[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20)] ‘부산’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5가지 이유

입력 2011-06-09 18:05


왜 부산국제영화제인가? 자주 듣는 질문이었습니다. 서울이 아니고, 왜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하느냐는 뜻이죠. 이럴 때마다 저는 “왜 파리가 아니고, 칸이냐”고 반문합니다. 부산의 젊은 영화인들이 부산에서 영화제를 시작했기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인 것이죠. 서울에서 처음 국제영화제를 개최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짧은 기간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가 됐습니다. 세계에서 적어도 7∼8위권에 드는 가장 주목받는 영화제로 성장했습니다. ‘문화 불모지’ 부산을 아시아 영상산업의 중심도시로 만들었고, 같은 기간 한국영화를 고도성장케 한 ‘성장 동력’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 원인은 무엇인가?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산’이었기에 성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산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부산이 어떤 곳입니까. 바다가 있는 항구도시죠. 많은 영화제가 바다, 호수 등 물이 있는 수변도시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꿈의 공장인 영화’와 ‘꿈의 보고(寶庫)인 바다’는 환상의 콤비입니다.

칸, 베니스, 산세바스티안… 모두 항구도시입니다. 로카르노, 소치, 몬트리올… 호수를 끼고 있습니다. 하와이, 라스팔마스, 타히티, 오키나와… 모두 섬입니다. 체코 카를로비바리, 프랑스 도빌은 대표적 휴양지입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영국 에든버러, 호주 시드니는 세계적 관광명소입니다. 영화제들은 이런 곳에서 열리고, 또 성공하고 있습니다.

부산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동백섬에서 미포에 이르는 바닷가는 칸의 해변을 옮겨 놓은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산세바스티안의 해변 또한 해운대와 닮은꼴입니다. 그런데 부산에는 생선회에 소주잔 기울이며 밤을 지새우는 낭만이 있습니다. 칸이나 산세바스티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 어떤 곳에 가도 이런 정취는 맛볼 수 없습니다. 부산시민들에겐 열정이 있습니다. 말은 무뚝뚝하지만 화끈하고 정이 많습니다. 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탄생시키고, 성공케 한 배경입니다.

역사적으로 부산은 ‘영화의 도시’였습니다. 영화에 관한 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도시가 바로 부산입니다.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부산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영화의 선구자였던 윤백남이 감독으로, 나운규가 배우로 데뷔했습니다. 이규환 감독의 ‘갈매기’(1948), 전창근 감독의 ‘낙동강’(1952) 등 많은 영화가 부산에서 촬영됐습니다.

‘영화상’도 부산이 먼저 창설했습니다. 1958년 부산일보사가 ‘부일영화상’을 제정했습니다. 첫 영화제에서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김승호와 주증녀가 남녀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1962년 대종상,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상)이 창설될 때까지 부일영화상은 많은 감독과 배우를 데뷔시켰습니다. 역사속의 ‘영화도시’임에도 ‘영화의 변방’ ‘문화의 불모지’로 잠자고 있던 부산을 깨운 게 부산국제영화제입니다.

둘째, 부산영화제는 첫 해 18만4000명 관객이 몰리면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젊은 세대가 지닌 영화에 대한 ‘갈증’을 부산국제영화제가 풀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한국 영화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21%, 미국 영화는 74%였습니다. 흥행성 높은 미국 영화만 수입돼 상영된 결과죠. 영화제란 무엇입니까.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바로 영화제입니다.

첫 해 36개국 169편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유럽과 아시아 영화, 특히 수입이 금지된 일본 영화가 대거 상영돼 영화 마니아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부산영화제는 영화 검열의 ‘무풍지대’이자 ‘해방구’였습니다. 상하이나 싱가포르 영화제가 입증하듯 영화제에서 검열은 치명적입니다. 처음 3년간은 부산영화제 상영작도 ‘심의’를 받아야 했지만 이를 잘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부산의 관객은 세계에서 가장 젊습니다. 2002년 부산발전연구소의 관객조사에 의하면 25세 미만이 56%, 29세 이하(10∼20대)는 71.6%, 35세 미만은 90.8%였습니다. 남포동 거리를 꽉 메운 젊고 열정적인 관객들로 인해 부산영화제는 가장 젊고 역동적인 영화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셋째, 정부와 부산시, 유관단체와 후원자, 그리고 부산시민의 적극적 지원과 동참이 있었습니다. 정부와 부산시의 예산지원이 없었다면 부산영화제는 소규모 ‘지방영화제’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산시의 대폭적인 지원은 급성장을 뒷받침해줬습니다. 대우개발 등 많은 기업과 부산영화제를 사랑하는 모임(부사모), 각종 단체와 개인의 동참이 없었다면 오늘의 부산영화제는 없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목표와 전략, 이를 뒷받침하는 프로그램과 프로젝트가 좋았습니다. 1995년 겨울, 영화제 창설을 준비하면서 영화제의 성격, 목표, 개최 시기, 규모를 놓고 숙의에 숙의를 거듭했습니다. 당시 아시아에는 1977년 창설된 홍콩영화제와 1985년에 출범한 도쿄영화제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도쿄영화제는 ‘반면교사’로 작용했고, 홍콩영화제는 우리에게 ‘시운’(時運)을 안겨줬습니다.

‘아시아의 칸’을 목표로 출범한 도쿄는 칸처럼 경쟁영화제를 지향했기에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비경쟁영화제’를 선택했습니다. 경쟁영화제는 화려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좋은 영화를 구할 수 없는 치명적 단점이 있습니다. 칸 베를린 베니스처럼 3대 영화제가 아니면 경쟁 부문 상영작을 구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한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올랐던 영화는 다른 경쟁영화제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감독이나 제작사는 기왕이면 3대 영화제에 출품하려 합니다. 후발 영화제인 부산에서 거장감독의 신작을 경쟁 부문에 선정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경쟁을 원칙으로 하되, 최우수 아시아 신인감독에게 차기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뉴 커런츠 상’ 하나만 시상키로 했던 것이죠. 부산국제영화제는 처음부터 아시아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는 데 목표를 뒀습니다.

다섯째,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배제하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왔기에 영화제의 색깔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제1회부터 관료나 정치인의 축사를 없앴고, 창설멤버들이 지금까지 영화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성을 유지한 것입니다.

끝으로, ‘술로 영화제를 성공시켰다’거나 ‘술로 세계 영화계를 제패했다’는 기사가 종종 언론에 등장했습니다.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첫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오석근 사무국장이 해운대 바닷가에 제가 마신 술병을 쌓아서 조각물을 만들어 전시하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많이 마셨습니다.

제1회 영화제 기간 중 하루는 자정이 넘어 공식행사가 끝났습니다. 메인 호텔인 부산호텔 근처에 문 연 식당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호텔 앞 차도에 신문지를 깔고 근처 포장마차를 불러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부산을 찾은 해외 영화제 집행위원장들, 감독들, 평론가들이 함께했습니다. 후에 ‘스트리트 파티’로 불린 진풍경은 지나가던 방송기자에 의해 매스컴을 탔습니다. 이때 함께 있었던 많은 외국 영화인들은 그때가 아직도 그립다고들 합니다.

1998년 10월, MBC 프로그램 ‘성공시대’에 출연했습니다. 저와 부산영화제의 성공사유 중 세 번째로 ‘술(酒)’이란 타이틀 아래 임권택, 안성기, 강수연, 박중훈 등 배우들이 술에 얽힌 일화만 소개하는 바람에 시청자들로부터 ‘술꾼’이란 오인을 받게 됐습니다. 1999년 제4회 강원동계아시아경기대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새로운 경험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TV에서 봤다며 술을 권하는 통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사유, 다섯 가지로 요약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