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자유를 숨쉬다… 춘천소년원생들 담장 밖 나들이
입력 2011-06-08 15:49
소년원에 발을 들인 건 오해 때문이었다. 보도직 공무원. 신문방송을 상대하는 직종인 줄 알았다. ‘보도’는 ‘報道(소식을 전함)’가 아니라 ‘輔導(도와서 인도함)’였다. 소년원생을 지도하는 공무원이었다. 지금은 소년 보호직으로 불린다. 1978년 보도직 공무원 모집 공고가 떴다. ‘소년 보호직’이었다면 응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해 말 보도직 공무원이 됐다. 그는 춘천소년원 장장봉(60) 원장이다.
장 원장은 51년 전남 광산군 농가에서 태어났다. 광산은 1988년 광주에 구(區)로 편입됐다. 4남2녀 중 둘째였고 장남이었다. 다섯 살 많은 누나 아래 형이 있었는데 홍역으로 죽었다. 일찍 죽어서 본 적 없는 형은 장남 자리를 내줬다. 아홉 살에 입학했다. 남들보다 두 살 많았다. 집은 넉넉지 않았다. 하교하면 부모는 일을 시켰다. 농사를 돕고 소 먹일 꼴을 베어 오게 했다. 싫어서 게으름을 부렸다.
소년원으로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취했다. 학교가 광주에 있었다. 세 살 많은 사촌 형과 지냈다. 집에서 쌀과 반찬을 갖다 먹었다. 72년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입대 영장을 받았다. 스물한 살이었다. 아버지는 “네가 대학에 가면 네 동생들도 보내야 한다.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했다. 그해 6월 입대했다.
제대하고 공무원 시험을 봤다. 76년 교정직에 합격했다. 목포교도소에서 근무했다. 2년 뒤 보도직 공무원 시험 공고가 떴다. 근무 환경이 교정직보다 낫다는 말에 지원했다. 언론과 관계있는 일로 생각했다. 그해 12월 보도직 9급 공무원이 됐다. 언론과 무관했다. 비행 청소년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근무지는 소년원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나갈 마음이 들었다. 소년원과 교도소는 다 같은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사고 쳐서 들어온 아이들이 순순할 리 없었다. 선배들은 보도직이 성직(聖職)이라고 했다.
아들 잃은 남자
부산소년원에 처음 발령됐다. 초면의 소년원생들은 잘생겼었다.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과 소년원 밖에 있는 아이들은 생김새로 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집에서 방치된 아이들이 소년원에 왔다. 대부분 한 부모나 조부모가 키웠고 가난했다. 외로워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배고파서 빵을 훔치고 자존심 때문에 싸움질을 했다. 삶이 버거운 아이들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었다. 이직 계획을 버렸다.
아이들은 거칠었다. 서로 치고받았다. 팔이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아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부모들은 와서 남의 아이를 탓하다 합의했다. 힘센 아이는 약한 아이를 괴롭히고 물건을 뺏었다. 아이들은 교사인 직원에게도 대들었다. 직원마다 지도 방식은 달랐다. 호통 치는 사람이 있었고 설득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듣는 학생과 안 듣는 학생이 있었다. 설득하는 쪽을 택했다.
80년 1월 제식 훈련 중 두 명이 탈주했다. 대열을 이탈해 월담했다. 한 명은 곧 잡혔다. 다른 한 명은 산으로 내달렸다. 직원들이 따라붙자 수원지로 뛰어들었다. 심장마비로 죽었다. 한겨울 물은 얼음장이었다. 죽은 아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잡혀온 학생에게 탈주 이유를 물었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어요.” 자유는 당연한 욕구였다. 죽은 아이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감이었다. 아들이 아프다는 말로 소년원에 데려왔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남자는 말이 없었다. 다음날 시신을 거둬 갔다.
자식과 소년원생
그해 5월 육촌 형의 중매로 결혼했다. 이듬해와 83년 각각 아들, 딸을 낳았다. 어떤 아이가 일탈하는지 잘 알았다. 아이들은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했다. 간섭받고 비교당하는 것은 싫어했다. 충족되지 못하면 비뚤어졌다. 자식에게 관심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잔소리는 적게 했다. 엄마와 승강이하는 초등학생 딸의 종아리를 대나무 회초리로 때린 적이 있다. 매는 면전에서 수긍을 강요하는 수단이었다. 제압하는 것과 납득시키는 것은 달랐다. 지난해 결혼한 딸은 지금도 매 맞은 일을 말한다.
아들은 사춘기에 성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웃 여자의 속옷을 훔쳐보는 것을 목격했다. 성범죄로 소년원에 온 아이들이 떠올랐다. ‘나쁜 놈’이라는 인식이 강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던 생각은 ‘그럴 수 있겠구나’로 변했다. 근본적 욕망은 아들과 소년원생이 다를 게 없었다. 지켜야 할 선(線)을 넘고 마는 것이 어떻게 갈리는지는 알 수 없어도 그 사이가 좁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전국 소년원과 보호관찰소를 옮겨다녔다. 집은 항상 광주였다. 자취방이나 관사에서 살다 주말에 귀가했다. 89년부터 광주벧엘교회에 나갔다. 입대하고 뜸했던 교회를 다시 찾은 것이었다. 가정의 건강을 강조하는 설교에 동감했다. 집안이 화목해야 신앙생활도 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목사는 새벽기도회에 나오려면 배우자부터 이해시키라고 했다. 새벽같이 교회 가는 일로 갈등하는 부부가 많았다. 설교를 들으며 소년원생의 가정을 생각했다. 부모가 싸우고 돌보지 않는 가정에서 아이들은 어긋났다.
소년원에 다시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부모 말씀 잘 듣겠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하고 나가지만 환경은 변한 게 없었다. 무관심과 가정불화는 여전했다. 가난은 1∼2년 새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습관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친구들과 몰려다니다 같은 비행을 저질렀다. 최근 절도로 법원 심리를 받은 한 중학생은 판사에게 소년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보호관찰로 풀려나면 다시 죄지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학생은 소년원에서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경북의 한 고교에 진학했다.
나들이
장 원장은 7일 학생 20명과 강원도 양양으로 2박3일 현장체험학습을 나섰다. 민간인으로 구성된 법무부 소년보호위원 양양협의회와 춘천소년원이 11년째 진행하는 활동이다. 소년원생을 밖으로 불러내는 행사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학생들은 소년법 32조 1항의 10호 처분을 받은 장기 수용자였다. 장기는 6개월 이상 2년 미만이다. 만 12세 이상 가운데 비행 정도가 무거울 때 이 처분을 받는다.
청색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은 첫날 오후 5시쯤 동해 백사장을 밟았다. 앞서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 양양 연어사업소 등을 견학했다. “야, 사진 찍자!” 학생 4명이 파도가 부딪히는 바위에 올라가 폼을 잡았다. 물비린내가 날렸다. 모래밭에선 씨름판이 벌어졌다. 쭈그리고 마주 앉은 학생들이 있었다. 소년원에서 나가면 뭘 할지 대화 중이었다. 경주 출신 학생(17)은 1년4개월 만에 처음 야외로 나왔다고 했다. 학생들은 체육복 상의를 입은 팀과 벗은 팀으로 나뉘어 모래밭에서 공을 찼다. 골을 넣고 놓칠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뒤섞였다. 벗은 팀이 이겼다. 진 팀이 업고 해변을 걸었다.
장 원장이 말했다. “아이들은 굉장히 활동적입니다. 얼마든 좋은 쪽으로 쓸 수 있는 힘이죠. 가정에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보살폈으면 아이가 소년원까지 오진 않았을 거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소년원에 오는 비행은 폭력과 절도가 절반 이상이다. 한 여성 자원봉사자는 “부모가 힘이 없어서 다소 억울하게 소년원에 오는 애들도 있어요. 부모가 판검사나 재력가면 순순히 보내겠어요?”라고 했다.
소년의 눈물
학생과 직원은 해가 진 낙산해수욕장에 둘러앉았다. 촛불 의식이었는데 불은 바닷바람에 꺼졌다. 돌아가며 말했다. 발언자는 밤바다를 보고 가운데 섰다. “비록 사고 쳐서 소년원에 왔지만 뭔가 하나라도 배워서 나가고 싶습니다. 지금도 날 위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울음이 올라왔나 보다. 다른 학생은 다짐했다. “그동안 제 생각을 않고 살았습니다. 앞으론 제 미래를 생각하면서 제대로 살려고 합니다. 소년원에 다시 올 땐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장 원장도 발언했다. 그는 쑥스럽다며 뺐는데 학생들이 ‘원장님, 원장님’ 하고 불렀다. “소년원에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33년이 지났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걸 줬다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저와 직원들이 여러분에게 준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장 원장은 소년원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한다. “부모 교육이 절실합니다. 젊은 부모나 나이 든 부모나 똑같이 아이들 잘 양육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는 좋은 부모가 되기 어렵습니다.”
8일 아침 백사장에서 기마전이 벌어졌다. 장 원장은 금세 모자를 뺏겼다. 그는 오는 28일 정년퇴임한다.
양양=글 강창욱 기자·사진 이동희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