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얼굴 되살리는 ‘사랑의 손길’… 개도국 기형환자 1500명 도와

입력 2011-06-08 10:23


선후배 의사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10여년 동안 사랑의 인술을 펴고 있다. 서울 청담동 101성형외과 백무현(56) 원장과 경기도 광명 철산3동 광명성애병원 성형외과 의사 김진수 이동철 노시영 기세휘 양재원씨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매년 2차례씩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한국기아대책 사업장을 찾는다. 이들이 돌보는 환자는 언청이, 손과 발가락 기형인. 얼굴을 비롯한 몸에 난 혹을 제거해 예쁜 모습을 찾아준 이만 1500명이 넘는다.

지난 3일 오후 8시 광명성애병원 861호실. 백 원장이 최근 퇴근하면서 잊지 않고 찾는 병실이다. 병실은 캄캄했다. 불을 켜자 병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라구타 바야체슬라바(슬라빅)씨가 한쪽 눈을 겨우 떴다. 그는 갑자기 백 원장의 손을 잡아챘다. 검지로 백 원장의 손바닥을 콕콕 찔렀다. 그러곤 자신의 오른쪽 눈으로 가져갔다. 붕대를 풀고 눈알을 긁었던 실밥을 잘라냈더니 청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올해 25세인 슬라빅씨는 원래 잘생긴 청년이었다. 2009년 5월, 일당을 벌기 위해 고압선 수리에 나섰다가 그만 화를 당했다. 오른쪽 눈은 실명, 오른쪽 뺨과 턱뼈가 주저앉았다. 두 사람은 지난해 여름에 처음 만났다. 의료 봉사활동을 하러 현지를 방문한 백 원장 일행에게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얼굴 한 쪽이 뭉그러진 상태였다. 현지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백 원장은 그 청년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일까. 지난 1월 기아대책에 이들 모자로 보이는 사진 제보가 접수됐다. 슬라빅씨는 형과 함께 70대 중반의 아버지,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한국에 올 비행기 삯은커녕 끼니도 제대로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백 원장은 또 사비를 털었다.

지난 4월 17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슬라빅씨의 간수치는 200 이상으로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현지에서 한 수혈로 C형 간염에 걸린 것. 보름 정도 지나자 다행히 간 기능이 좋아졌다. 수술은 광명성애병원 후배들에게 맡겼다. 김진수 과장의 집도로 눈 주변 복원 수술 등 4차례에 걸쳐 수술이 진행됐다. 슬라빅씨는 내년에 한 번 더 수술을 받으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백 원장은 1999년부터 개인적으로 의료봉사 활동을 펴오다 2002년부터 기아대책과 인연을 맺었다. 서울 방배동 새순교회 안수집사인 백 원장은 지난해부터는 저소득층 의료지원 사업인 ‘생명지기’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12년 동안 쉬지 않고 의료봉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다. 대학 체육과 교수였던 아버지의 월급봉투는 제자들을 돌보느라 늘 텅 비었다. 백 원장의 어머니 고(故) 이계남 여사는 삯바느질 등으로 자식을 길렀다. ‘∼와 같은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녀의 훈육기도는 늘 이랬다. 큰아들은 ‘루스벨트’, 둘째 아들은 ‘베토벤’ 등 자녀들마다 롤 모델을 세웠다. 신기하게도 그 기도는 모두 이뤄졌다. 서울법대 교수와 이대 음대 교수 등 8남매는 모두가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백 원장은 중앙대 의대를 나와 슈바이처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 5일 오후 인천공항. 백 원장과 20여명의 의료팀이 키르기스스탄으로 가기 위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들의 아름다운 동행엔 현수막 한 장 보이지 않았다. 백 원장이 멸치와 미역, 사탕 등 선물이 가득 찬 대형 트렁크를 건네자 슬라빅씨는 서툰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며 연방 고개를 숙였다.

글·사진=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