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라이브 빗소리

입력 2011-06-07 17:52


빗줄기가 창을 타고 내린다. 빗방울이 흩어지면 투명한 수선이 창에 그어진다. 옥잠화 흰 꽃잎 속으로, 솔잎을 타고 내리는 빗소리에 잠시 고즈넉해진다. 마음이 한겹 한겹 차곡차곡 내려앉는다. 잠시 생각이 길을 잃어버린다. 빗소리에 실려 그만 떠내려가고 싶어진다. 빗소리에 오도카니 서있는 여자를 또 하나의 여자가 들여다본다.

아는 사람이 하모니카 연주로 유명한 리 오스카(Lee Oskar)의 ‘Before the Rain’을 보내왔다. 음악도 좋지만 곡 마지막의 빗소리는 콧마루가 찡할 만큼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처음에는 여리다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세상의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격하고 분노했던, 숨 막혔던 안타까움도, 아쉬움도, 빗소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모든 것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짧은 글이 생각난다. 읽는 내내 빗소리에 목소리를 잃어버려 꼭 무성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장대비가 내리는 여름날 한 청년이 원두막에 있는데 여승이 원두막 아래로 와 비를 긋는다. 청년은 그녀의 옆모습이 고혹적이어서 올라오기를 권한다. 너무 높은 사다리여서 주춤하고 있는 그에게 청년은 손을 내준다. 그리고 참외 한쪽을 권한다. 시장하던 참인지 맛있게 베어 먹는데 그 하얀 치아를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 뒤 한쪽 팔이 없는 남자가 찾아와 절을 묻는다. 청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알려준다. 다음날 아침 청년은 참외밭이 끝나는 곳에 합장을 한 여승과 이별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름다운 별리를 보며 작가는 소설로 탈고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의 기억으로 남겨지길 원했다.

북한강이 옆에 있는 연수원에서 근무를 할 때였다. 평소에도 조용한데 그곳은 비가 오면 더 고요했다. 비가 잦은 나날이 계속되던 6월. 혼자 사는 재미가 어떠냐고 친구가 연락을 했다. 나는 수직으로 내리는 비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무슨 암호 같다고 했다. 굼실거리며 흐르는 강물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오라고 했다. 거대한 삼림에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혼을 빼앗길 거라고 했다. 친구와 산 굽이굽이를 돌며 찻집을 찾아갔다.

비는 대지를, 대지는 비를 감싸 안는 소리로 주위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렸다. 빗소리에 갇힌다는 말이 맞았다. 비가 내리면서 파이는 수많은 동그라미들. 그 동그라미와 빗소리로 자라는 나무들과 벌레들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기와의 고른 간격을 타고 내려오는 빗방울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람들 사이에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간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산촌 너와집 뒷방의 들창을 열어놓고 귀를 다 내주고 싶다. 돗자리에 누워 한없이 뒹굴고 싶어진다. 몇몇 사람들에게 적조했던 소식을 문자로 띄웠다. “창문을 열어보세요. 빗소리를 들어보세요.” ‘Before the Rain’의 볼륨을 잔뜩 올리듯이, 나는 빗소리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댄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