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은 그리스도로 통했다”… 중국 6·4 민주화운동 주역들, 그후 22년

입력 2011-06-03 17:39


조국을 등졌다. 가족들과도 생이별했다. 외국생활인지라 녹록지 않았다. 절망과 그리움에 몸부림쳤다. 그때 복음은 한 줄기 빛이자 희망의 끈이었다. 1989년 6·4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학생 지도자들의 이야기다.

시위주동자로 지명수배됐던 이들이 고통을 딛고 속속 크리스천이 되고 있다. 부흥사, 이라크전 참전 군목 등 목회자가 되는가 하면 개인 기업과 NGO 등을 일구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기독교 신앙만이 개인 인생뿐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종착점”이라고 강조한다. 89년 지명수배자가 된 21명 학생 지도자 중 4명이 목회자 또는 평신도 지도자가 됐다. 아직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지만 종교학박사 학위를 받은 펑충더(45)와 왕단(42) 우얼카이시(43) 리루(45) 등도 기독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민주화운동 당시 ‘중국의 잔다르크’로 불린 차이링(45)은 중국정부의 학생 지명수배자 21명 명단 중 세 번째에 올라있었다. 그는 10개월간의 도피생활 중 숱한 체포 위기를 넘긴 뒤 배에 실린 나무궤짝에 5일간 몸을 숨겨 90년 부활절 전야 홍콩으로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차이링은 그때 심정을 “어릴 적 느꼈던 공포와 고독 그 자체였다”고 술회했다.

베이징대 캠퍼스 커플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펑충더와도 망명 후 헤어졌다. 설상가상 사랑하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지만 마지막을 지켜볼 수 없었다. 심적 고통 속에 죽음까지도 생각했었다. 그때 미국 화교교회는 그의 버팀목이 됐다고 한다. 프린스턴대 국제관계학석사와 하버드대 경영학석사 학위를 마친 그는 미국회사에서 일하던 중 미국기독교인 로버트 A 매긴 주니어를 만나 결혼, 현재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인터넷교육업체 CEO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부활절(4월 4일) 미국 보스턴의 한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됐다.

차이링은 “대학재학 중 한 선배로부터 촌부가 전해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며 “훗날 기독교 신앙이 나의 삶을 사로잡을 줄 몰랐다”고 했다. 이어 “예수님은 나의 마음속 상처를 씻어주셨고 난 오랫동안 갈망했던 평정을 찾았다”며 “특히 목사님이 날 위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때 하나님의 영이 내 맘에 충만해진 걸 느꼈다”고 간증했다. 그는 NGO ‘모든 소녀를 허용하라(All Girls Allowed, AGA)’ 등을 설립, 중국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가 하면 여아낙태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89년 당시 천안문 광장에 설립된 민주대학을 이끌던 베이징대 출신 장보리(54)와 슝옌(46), 칭화대 출신 저우펑숴(44)가 복음 전도자가 됐다. 이밖에 6·4 민주화운동 때 70명의 지식인들이 당국에 보내는 공개 서안의 초고를 작성한 위안즈밍(56), 그와 함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TV 다큐멘터리 ‘허상’의 작가 셰쉬안쥔(57)도 목회자가 돼 미국을 기반으로 전 세계 화교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