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접촉도 좋지만 군사력이 이래서야

입력 2011-06-02 18:35


북한이 발표한 남북 비밀접촉의 상세(詳細)가 사실이라면 참으로 이 정권답다는 생각이 든다.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이라는 개념에 실용주의 정신이 도저(到底)하다. 한마디로 되치기 당한 씨름이다. 북한은 “우리의 사과를 받아내려고 요술을 부리기 시작하였다”며 판을 걷어찼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사과가 아니면서도 사과처럼 보이는’ 발언을 할 경우 보장받는 실익보다 남쪽에 구축된 ‘종북(從北) 인프라’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더 큰 손실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의 협상술이 왜 다른 나라들로부터 “터프(tough)하다”는 평가를 받는지 정부가 깨달았다면 그마나 소득이다.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까지 갔던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특유의 배짱과 밀어붙이는 화법으로 성과를 거둘 것으로 자신했었다. 2000년 첫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오랫동안 궁리한 통일론과 유창한 변설로 김정일을 설득했다고 믿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도 달변을 믿고 평양에 갔다. 이명박 대통령은 숱한 정상외교에서 입증된 친화력을 발휘해 큰 건을 올리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대통령들이 정상회담에서 뭔가 해낼 것 같은 자신감을 갖는 것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았을 때 일어나는 착시(錯視) 현상이기 십상이다. 두 차례 정상회담 결과가 대변해 준다.

정상회담은 요술 아닌데

남북 비밀접촉은 최근 국내외에서 일어난 일들의 블랙박스를 여는 열쇠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9일 유럽 순방 도중 베를린에서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하면 내년 봄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하겠다”고 제의한 시간대에 베이징에서는 남북 실무자 간의 접촉이 이뤄졌다. 4월 일어난 농협 금융전산망 사고에 대해 검찰이 북한의 사이버 테러로 결론 내렸음에도 정부는 대북 조치를 유야무야 했다. 류우익 주중대사의 통일부 장관 기용설은 남북접촉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사인이었다. 지난달 30일 북한이 대남 비방 성명을 발표한 것은 비밀접촉 결렬에 대한 화풀이였고, 그것으로 모자라 1일 아예 상을 뒤집었다.

돈으로 평화를 산다면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 북한에 사과를 요구해온 정부가 “지혜롭게” 산을 넘으려 한 이중 플레이를 보고 정부의 안보 능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군의 전투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되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 군만으로는 북한에 밀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력뿐 아니라 대비태세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연평도 포격 후 북한이 서해5도를 상륙 점거할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군은 북한에 상륙전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 북한이 전통적 상륙전 개념과는 다르게 최신식 공기부양정에 의한 대규모 기습상륙작전을 할 수 있다는 게 알려졌다. 반면 최근 영화배우 현빈이 배치됐다는, 예닐곱명이 고무보트에 타고 노를 저어 적 해안에 침투하는 작전 개념의 기습특공 부대가 백령도에서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는 않다.

더 큰 문제는 군 지휘관들의 리더십이다. 연평도에 K-9 자주포가 부족해 북한 포격에 허둥댔던 해병대의 사령관과 사단장이 최근 진급 로비 의혹으로 조사 받은 것은 군 간부들의 임전(臨戰)의식 결핍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다. 군인 관료가 출세하는 행정 군대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 군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방개혁이 미덥지 못한 것도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문약(文弱)한 국가는 돈으로 평화를 사려 한다. 야당은 노골적으로 대북 지원을 평화유지 비용과 동일시한다. 이래서는 건전한 의지를 가진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정상회담에 응하면 지원해 주겠다는 건 우리의 만용인지도 모른다. 국방력이 우선 아닌가.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