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오은영] 다시 푸르른 날

입력 2011-06-02 18:33


5월이 갔다. 5월은 봄을 데리고 가버렸다. 봄이 되었을 때 그 황홀함을 기억한다. 쏟아지는 햇살비를 맞으며 서있던 꽃나무들의 눈부신 자태를 기억하고, 그 눈부심에 두근대던 가슴의 떨림을 기억한다.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 분홍빛 진달래, 흰 목련과 보랏빛 수수꽃다리. 꽃빛에 취하고 꽃내음에 취해 자꾸만 밖으로 나가고 싶던 계절, 봄이 갔다. 이제 창밖은 단색의 계절이다. 산을 가도, 길을 가도 온통 푸르름이다.

앞날을 생각해 보겠다며 대학을 휴학한 아들이 6월 초 외국여행을 떠난다. 아직 군대를 가지 않았고, 학교가 가까우니 친구와 간 여행 말고는 집을 오래 떠날 일이 없던 아들이다. 적어도 석 달 동안은 부모에게서 벗어나 맘껏 자유로울 수 있다는 푸르른 기대로 아들은 한껏 들떠 있다. 아들이 가기 전, 연꽃농원과 수종사로 가족 나들이를 갔다. 그런데 아직 연꽃이 피지 않아 연못은 초록 연잎만 가득했고, 산으로 가는 길도 온통 초록빛이었다.

나들이 내내 아들의 대화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결국 여행으로 이어졌다. 벌써 여름이 온 것 같다며 투덜대다가도 그곳의 기후를 걱정했다. 책 이야기를 하면 그곳에 관한 책을 갖고 가야겠다며 손가락을 튕겼다. 멋진 카페를 보면 어김없이 그곳의 갤러리나 소호를 가봐야 하냐며 툴툴댔다. 아들은 여행이 푸르기만 할 것 같나 보았다. ‘혹시나’ 하는 내 잿빛 걱정은 아들 귀 언저리에서 맴돌다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반가운 아파트 앞을 지났다. 여러 번 이사 끝에 처음 가진 내 집이며 새 아파트였다. 그 집에서 살 때 정말 기뻤다. 둘째까지 유치원에 들어가 내 시간이 생기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게다가 나이도 30대였으니 뭐든 새로 시작해도 될 것 같던 푸르른 시절이었다. 한순간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같은 나들이 길에서 아들은 다가올 푸르른 날을, 나는 지나간 푸르른 날을 보았다. 문득 서정주 시인의 시 ‘푸르른 날’이 떠오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로 시작되는…. 저런, 아직 그리움이 없는 아들은 미래에 그리워할 푸르른 날을 만들려 하는데, 나는 과거의 푸르른 날만 그리워했구나!

미래를 꿈꾸기보다 과거를 더 많이 추억하면 나이든 증거라고 한다. 맞다, 난 과거를 추억할 만큼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다. 그 말은 50세, 60세가 되어도 미래를 꿈꿀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는 거다. 어쩌면 아이에, 일에 얽매이던 젊은 시절보다 더 많은 시간적 여유를 즐길 수 있다. 건강만 허락하면 다시 푸르른 날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지나간 푸르른 시절을 그리워 말고 다가올 푸르른 시절을 반갑게 맞기로! 아들이 새로운 6월에 달뜨듯 나도 나름대로 여유가 생길 6월에 달뜰 테다. 그래, 5월은 간 것이 아니다. 푸르른 6월을 마음껏 누리려고 내가 5월을 보냈다.



오은영(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