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19)] ‘국제연대’에 주력… 부산의 목소리 키워
입력 2011-06-02 18:13
지난 15년, 부산국제영화제는 ‘국제연대’를 구축하는 일에 주력해왔습니다. 비평가 모임인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와 세계비평가연맹(FIPRESCI), 유럽 각국의 영화진흥 및 배급단체 모임인 유럽영화진흥기구(EFP),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 그리고 국제영화제들과의 제휴로 부산영화제와 한국영화를 해외에 알리고, 영화 선정과 프로그램 교환 등 실질적인 교류를 확대해왔습니다. 일본의 가와키타 메모리얼, 프랑스의 유니 프랑스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이탈리아의 필름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 영화 관련 기구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한국영화를 소개했습니다.
첫째, 부산영화제 창설준비 과정에서부터 협력체제를 구축한 것은 아시아영화진흥기구입니다. 아시아권의 네트워크를 마련하는 것이었죠. 이를 통해 첫해부터 중요한 아시아 영화인들을 초청하고, 좋은 영화들을 선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영화진흥기구가 최우수 한국영화에 주는 ‘넷팩상’도 마련했습니다. 아루나 바수데프(‘시네마야’ 발행인), 자넷 펄슨(하와이영화제 집행위원장), 필립 치아(싱가포르영화제 집행위원장)가 제1회 부산영화제 넷팩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가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1990년 8월 27일, 인도 영화잡지 ‘시네마야’는 유네스코와 공동으로 ‘실험영화와 비 상업영화의 진흥과 배급을 위한 아시아 네트워크의 창설’이란 주제로 국제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뉴델리에서 나흘간 열린 회의에 참석한 저는 참가자 전원을 김태지 인도 주재 대사의 관저로 초청해 많은 영화인들을 사귀었습니다. 이듬해 10월 일본 야마카타다큐멘터리 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 진흥에 관한 비공식 회의가 개최됐고, 아시아영화진흥기구가 정식 출범했습니다. 시네마야 발행인 아루나 바수데프가 회장에 선출됐습니다. 2000년 4월 저는 새로 신설된 부회장에 선임됐고, 2002년 이 기구의 본부를 싱가포르에서 부산으로 옮겼습니다. 4년 전 다시 말레이시아로 이전했지만 아시아영화진흥기구는 부산영화제의 든든한 네트워크가 됐습니다.
둘째, 세계비평가연맹은 부산영화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인과 영화평론가로 구성된 이 단체는 주요 영화제에서 세계비평가연맹 상을 수여합니다. 또 수상영화 중 1편을 선정해 그 해의 세계비평가연맹 상을 수여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이 상을 탔습니다. 1996년 5월, 부산영화제 창설을 앞두고 찾아간 칸영화제에서 클라우스 에더 세계비평가연맹 사무총장을 만났습니다. 저는 부산영화제 창설을 알리며 도움을 청했고, 부산영화제는 2회부터 세계비평가연맹 상을 시상하게 됐습니다.
안드레이 플라호프(러시아), 노벨트 뮐베르거(독일), 애슐리 라트나비부샤나(스리랑카), 원탁청(말레이시아) 그리고 이영일(작고) 평론가가 참여했던 심사회의에서 프룻 챈(홍콩)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이 첫 수상을 했습니다. 당시 세계비평가연맹 회장이던 영국의 데렉 말콤은 저와 테니스 동호인입니다. 그의 후임자인 프랑스의 미셀 시망은 부산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홍상수, 이창동 감독의 열렬한 후원자입니다. 현재는 프랑스 평론가 장 로이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산을 방문하는 세계비평가연맹 회원들은 신문, 방송, 잡지나 출판물을 통해 부산영화제와 한국영화를 알리는 매우 중요한 메신저입니다.
셋째, 유럽영화진흥기구는 부산영화제의 핵심 파트너입니다. 제1회 영화제를 마치고 제2회를 준비하던 1997년 4월 3일 저는 한 통의 팩스를 받았습니다. 레나테 로제 명의로 된 팩스에서 ‘1997년 2월 16일 베를린영화제에서 유럽영화진흥기구를 창설했는데 5월 칸영화제에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럽영화진흥기구 사무총장인 레나테 로제는 제1회 부산영화제에 참석했던 바우터 바렌드레트(작고, 영화제작사 포티시모 창설자)로부터 “부산영화제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유럽영화진흥기구는 제2회 부산영화제에 대표단 5명을 보냈고, 이듬해엔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 등 대규모 대표단이 부산을 찾았습니다. 이후 매년 부산에서 파티를 열며 한국영화의 유럽 진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넷째, 국제영화제작자연맹과도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33년 창설된 이 기구는 주로 영화제작자 및 영화제 간의 협력과 권익 신장을 목적으로, 영화제의 인증(등록)과 개최일자 조정, 불법복제 방지를 위한 협력 등의 업무를 수행합니다. 현재 칸 베를린 베니스 등 14개 경쟁영화제, 부산 테살로니키 등 27개 특별부문의 경쟁영화제, 토론토 런던 등 5개의 비경쟁영화제 그리고 2011년 새로 등록한 오버하우젠 등 5개 영화제를 합쳐 모두 51개 영화제가 등록돼 있습니다. 종전에는 경쟁영화제를 A, B 등급으로 분류했지만 영화제들의 반대로 최근에 없앴습니다. 2006년 1월 23일 파리 국제영화제작자연맹 본부에서 오찬을 겸한 회의가 열려 연맹 이사를 선정했습니다. 연맹에서는 안드레아 빈센테 고메츠 회장(스페인), 발레리 레핀-카닉 사무총장과 브노아 기니스티 사무차장이 참석했고, 영화제에서는 질 자콥 칸영화제 조직위원장과 마르코 뮐러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그리고 제가 참석했습니다. 정말 전무후무하게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2007년 여름, 도쿄영화제가 개최 시기를 부산영화제 직후인 10월 말에서 부산영화제 직전으로 옮기겠다는 뜻을 연맹에 전달했습니다. 브노아 기니스티 연맹 사무차장이 제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저는 막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 도쿄영화제 가도카와 회장 등을 만나 개최일 변경 계획을 취소시켰습니다. 제작자연맹의 이사로서 연맹과 친했던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끝으로, 영화제 간 협력 또한 매우 필요합니다. 2009년 11월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채프만 대학교 다지 칼리지에선 ‘부산 인 웨스트(Busan in West)’영화제가 열렸습니다. ‘미국 서부에서 열리는 부산영화제’란 뜻입니다. 이 대학의 밥 베셋 학장과 이남 교수를 비롯한 교수, 학생들이 10월 개최된 부산영화제를 관람한 뒤 공식 협력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상영된 한국영화를 학교 캠퍼스에서 상영하는 영화제를 개최한 겁니다. 지난해에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열리지 못했고, 올해 11월 15일 다시 개최될 예정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 부산영화제가 탄생한 셈이죠.
프랑스의 도빌 아시아영화제는 부산영화제와 최초로 자매결연을 했습니다. 외과의사인 알랭 파텔은 1999년 3월 도빌에서 아시아영화제를 개최한 뒤 그해 10월 부산영화제에 참가했습니다. 이듬해 도빌과 부산에서 두 영화제의 자매결연식이 열렸습니다.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들이 교환 방문하기 시작했고, 1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매년 상영됐습니다. 제1회 도빌영화제에서 신상옥 감독 회고전을 가졌고 제2회 영화제부터 경쟁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 이후 한국영화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2000)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2001) ‘파이란’(송해성·2002)이 매번 5개의 상 중 작품상 남우주연상 관객상 등 4개를 휩쓸었습니다. 마치 ‘유럽의 한국영화제’를 방불케 했습니다. 시상 제도가 바뀐 2004년 이후에도 ‘바람난 가족’ ‘여자 정혜’ ‘아라한 장풍 대작전’ ‘피터팬의 공식’ ‘놈 놈 놈’ ‘왕의 남자’ ‘검은 땅의 소녀’ ‘똥파리’ 등 수상 행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우디네 극동영화제와 아르메니아 예레반영화제 또한 부산영화제와 자매 관계에 있고, 올해 인도의 뭄바이영화제와도 제휴했습니다. 서로 집행위원장 또는 프로그래머를 교환 초청하며 프로그램도 교류합니다. 폴란드의 크라쿠프영화제는 지난해부터 부산영화제 섹션이 새로 생겼고, 올해 3회를 맞은 오키나와영화제와 지난해 출범한 베트남영화제는 창설 과정부터 부산국제영화제와 긴밀하게 제휴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창설부터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 관련 국제기구는 물론 국제영화제와의 협력과 유대를 확대해 왔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영화제 위상을 높이면서 한국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전도사로서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