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강렬] 촌지
입력 2011-06-02 17:50
촌지(寸志)의 사전적 의미는 마디 촌(寸) 뜻 지(志), 즉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다. 자(尺)가 귀했던 옛날에는 한 뼘, 한 길, 한 걸음 등 신체 한 부위를 사용해 길이를 쟀다. 촌(寸)은 손가락 ‘한 마디’의 의미로 ‘짧다’는 뜻을 더하게 됐다. 촌심(寸心) 촌성(寸誠) 촌의(寸意) 촌정(寸情) 박지(薄志) 편지(片志) 심촌(心寸) 촌충(寸衷)도 촌지와 같은 의미다. 정(情)의 문화를 바탕에 깔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촌지는 과하지 않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인사의 한 방법이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남측은 ‘정상회담 개최를 빨리 추진하자’고 하면서 돈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민간 수준에서 과거 북측 인사와 접촉할 때 남측 인사들이 북측에 몇 십 달러에서 몇 백 달러의 ‘촌지’를 주는 것은 관행이었다. 이번 사안을 보면 액수를 알 수 없으나 정부 당국자 간에도 촌지를 주는 일이 늘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 1996년 민간 차원의 식량제공 문제를 북측과 협의하기 위해 뉴욕에서 북한 측 인사들을 처음 만났을 때 200달러씩 봉투에 넣어 촌지를 준 경험이 있다. 대표단장을 비롯해 단원들은 “우리는 이런 것 안 받습네다”라고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감시 차 따라온 국가안전보위부 요원은 공공연하게 받아 챙겼다. 그 2년 후 베이징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거리낌 없이 ‘촌지’를 받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 “이 사람에게도 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북한이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1년 뒤 북한에 들어갔을 때 담당 안내원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면 미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100달러’라고 했다. 50달러를 몰래 손에 쥐어줬더니 다음날 “마음은 고마우나 안 받겠다”고 했다. 마음의 정이라고 했더니 현금 말고 ‘선물’로 달라고 했다. 평양백화점에 가서 양담배 한 박스를 사서 줬더니 동료들과 나누겠다며 고맙게 받았다. 그 뒤에도 북측 사람들은 촌지를 고맙게 받았다.
촌지는 줄 만한 사람이 주고,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작은 정성’이 된다. 이번 남북 접촉에서 우리 측 인사들이 어설프게 봉투를 줬다가 북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 관례에 따라 줬다고 하지만 주는 손이 부끄럽게 됐다. 남북이 만나 마음의 정이 담긴 작은 촌지도 못 전하는 사이가 돼 버렸으니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강렬 논설위원 ry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