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시]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입력 2011-06-02 17:49
허수경(1964∼ )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울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 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우체국 집배원의 발품으로 매주 이 코너를 통해 시 배달을 나갈 것이다. 시에 붙는 코멘트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지만 그저 희미한 우체국 소인 같은 것이라고 여겨주시길….
1980년대 후반, 진주에서 상경한 허수경은 90년대 초에 급작스럽게 독일로 이주했다. 거기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연구하고 있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유적을 발굴하는 그의 발걸음은 전쟁 중인 이라크에도 가닿았던 모양이다. 시 속의 이라크 할머니는 평생 글을 몰랐던 시인의 외할머니와 상통한다. 어느 봄날,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바다로 산책을 나가 “니, 그 바다 때깔, 보나, 니가 글을 쓸 줄 알게 되몬 그 때깔 이바구 먼저 써다고”했다던 외할머니. 그 할머니가 오줌냄새 몽실거리는 이라크의 노천 변소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내 오래된 영혼에는 필시 그날의 곱디곱던 봄 바다 때깔이 엉기고….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