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의 야구] 필드 위의 ‘나가수’

입력 2011-06-02 18:18


나는 TV 앞에 전기 철조망을 친 듯 산다. 책 같은 걸 쓰는 전근대적인 역할을 하는 작가 신세로 굳이 TV라는 강적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을 뿐더러 만날 마감하고 자빠져 있느라 볼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TV는 다만 프로야구를 중계해주는 장치일 뿐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철망을 걷고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나는 가수다’. 이 프로그램 요즘 참 번화한 화젯거리다. 노래 좀 하는 일반인이 아니고 노래로 먹고사는 프로들끼리의 생존경쟁이라니 흥미가 파릇파릇 돋는 것이다. 청중평가단의 다수결 투표라는 기준으로 예술 장르에 점수를 매기는 일이나 일말의 오락적인 연출엔 공감할 수는 없지만 볼 만한 음악 프로임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쟁쟁한 가수들이 있는 것 없는 것 그냥 다 쏟아내며 하얗게 자기 소리를 태워대잖아.

그건 그렇고 이 코너에서 나는 야구를 빙자한 시사나 일상을 소재로 칼럼을 쓰기로 했다. 야구의 상큼한 매혹에 대해 떠들기도 전에 ‘나가수’ 얘기부터 꺼낸 건 야구와 연결되는 요소가 있어서다. 그게 뭐냐면, ‘서바이벌’이다. 야구란 공을 때리고 살아 나가서 세 개의 두툼한 베이스를 거친 채 홈에 살아 돌아와야 비로소 점수가 인정되는 경기다. 득점방식 자체가 완전 생존게임인 것이다. 야구에서 아웃된 주자나, 무생물이 득점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한정된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한 최선의 실력경쟁 역시 서바이벌. 그러니까 프로야구란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나는 선수다’가 아닌가 한다.

수많은 야구선수들이 경기마다 ‘나가수’의 가수들처럼 자기가 가진 실력을 다 쏟아내고 있고 나는 손에 땀을 쥐고 그들의 서바이벌 경연을 즐긴다. 경쟁에서 지면 도태되는 그 냉혹한 무대 위엔 오락성보다 처절한 박진감이 넘친다. 그래서인지 ‘나가수’ 출연 가수들도 대기실에서 바짝 긴장 담그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나는 프로들까지도 그렇게 만드는 승부세계의 냉혹함에서 약간의 비장감을 느낀다. 우리의 삶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일지 모른다는 공감 때문일까. 어쨌거나 ‘나가수’나 프로야구를 보면서 떠오른 말이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한테 지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한테 진다는 상투적인 얘기. 그렇다. 뜨거운 서바이벌 경쟁이고 뭐고 내 눈에는 즐기는 쪽이 아무래도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긴 하더라. 아무리 기똥찬 노래를 부르거나 대박 야구 쇼를 펼쳐도 즐기는 것 같지가 않으면 별로 안 멋있거든. 난 진심으로 즐기려는 쪽에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서바이벌 게임에서의 가장 괜찮은 승부수이길 바라서다.

나는 책이 안 팔려서 늘 돈이라곤 없고 수많은 멋진 작가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버둥 살지만 글 쓰는 일이 아주 즐겁다. 지금 좀 처절한 막장이어도 계속 즐긴다면 끝내 살아남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니까.

아, 떠들다 보니 결론적으로 암만 빡빡한 인생의 서바이벌 경쟁도 즐기면서 해봅시다, 하는 따분한 소리가 되고 말았군. 아무튼 앞으로 이 칼럼도 열심히, 즐겁게 쓰다 보면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하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크크.

박상

기타 치며 야구하는 소설가.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장편소설 ‘말이 되냐’ ‘15번 진짜 안 와’, 소설집 ‘이원식씨의 타격폼’을 썼다. 록밴드 ‘말도 안돼’의 기타리스트이며 문인 야구단 ‘구인회’ 단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