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만드는 것 강요도, 선택도 아닌 내 마음에 있더라”

입력 2011-06-02 18:17


입양아 출신 신호범 美의원, 서마태의 멘토 되다

“나도 미군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입양아였단다.”

노인이 말했다.

“알아요. 당신은 우리들 사이에서 유명해요.”

청년이 답했다.

노인은 ‘같음’을 들어 위로했지만 청년에겐 ‘다름’이 커 보였다.

“그는 제 문제를 외면했어요.”

청년은 아버지(Father)란 단어를 쓰지 않고 말했다.

“네 세월을 좀 더 듣고 싶구나.”

일흔여섯 노인은 신호범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이다. 영어 이름은 폴 신. 한국 성(姓)을 유지하는 대신 양아버지(레이 폴)의 성을 이름으로 가진 건 그의 결정이었다. 신 의원은 지난달 1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공편에 실린 본보(5월 11일자 3면)에서 청년 서마태(33)씨 사연을 읽고 만남을 요청해 왔다.

서씨는 주한미군 병사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6개월 만에 입양이 결정됐으니 한국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를 입양한 양아버지는 미군 장교였다. 임신이 잘 안되던 아내를 위해 서씨를 입양했는데 아내가 아이를 낳자 서씨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아들로서는 물론이고 미국인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부모는 무슨 이유에선지 서씨의 미국 국적 신청도 해주지 않았다. 미국인에게만 주어지는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해 대학도 못다녔다. 잃어버린 20대를 보낸 뒤 입양기록을 토대로 한국 여권을 발급받아 귀국했다.

신 의원은 서씨 사연에 기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지난달 21일부터 31일까지 신 의원의 방한 일정은 이미 15번의 강연과 2번의 행사 참석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서씨를 출국 하루 전인 지난달 30일 대전으로 불렀다.

충남 당진 신성대학에서 재학생 500여명을 상대로 강연을 마친 그는 서울 여의도 특강을 위해 오후 4시10분 대전발 서울행 KTX 열차에 오르며 서씨를 창가에 앉히고 자신은 그 옆자리를 택했다. 서울역까지 주어진 시간은 59분. 시속 200㎞ 이상은 속도감을 느낄 수 없도록 설계된, 무척 빠르지만 빠르다는 걸 잘 느낄 수 없는 공간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듣기로 한 건 청년을 위한 노인의 배려였다.

입양

서씨와 신 의원에겐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다 주한미군 양아버지를 만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세 명의 백인 동생을 둔 것도 같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진 뒤 포대에 싸여 미국인 부모 품에 건네진 서씨와 다르게, 신 의원은 열여덟 나이에 미국인 부모에게로 갔다.

신 의원이 네 살이던 1939년, 유방암을 앓던 어머니는 가난에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아버지는 신 의원을 외할머니 손에 맡기고 떠났다. 개구쟁이 여섯 살 시절 막내 외종사촌의 엿을 빼앗아 먹다가 외숙모에게 호되게 맞은 뒤 집을 뛰쳐나와 부랑아 생활도 했다. 힘겨울 때면 외할머니를 찾긴 했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외면에 버려진 소년이 마음 붙일 곳은 없었다.

인생의 변곡점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심부름 소년) 시절 우연히 찾아왔다. 오랜 눈칫밥과 구걸 생활로 단련된 소년은 미군 사이에서 ‘총알(Buckshot)’로 불렸다. 치과의사이자 군의관이던 레이 폴 대위도 이때 만났다.

“폴 대위를 기쁘게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냈다. 혼자 지낼 땐 외로워 많이 울었다. 하루는 힘든 일과를 마치고 밤에 실컷 울고 싶어 언덕에 올랐다. 한참을 울다 보니 내 앞에 키 큰 미국인이 서 있었다. 그분이었다. 창피해서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떠나지 않고 왜 우는지 물었다. 그러곤 날 꼭 안아주면서 ‘미국에 내 아이가 셋 있는데 울 때마다 내 가슴이 아프다. 네가 왜 우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그 포옹이 나에게 인생을 다시 찾아줬다. 내 아버지(양아버지)가 그런 분이다. 환자가 와도 안아주시고, 내가 한국 교포들 데려와도 안아주시는 다정한 분이셨다.”

미국 귀환을 앞둔 폴 대위는 소년을 불렀다. “널 여기 두고 갈 수가 없구나. 너 내 아들이 될 수 있겠니? 가족에겐 이미 얘기해뒀다. 네 결정만 남았다.” 신 의원은 그때 결심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따르겠다. 설사 그게 지옥길이라도.”

미국

자라면서 백인 형제와 다르게 취급받았다고 느꼈던 서씨처럼 신 의원의 적응도 쉽진 않았다.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그가 미국 땅을 밟은 건 열여덟 되던 해였다. 미국에서 초청장을 보낸 후 2년이나 기다렸던 양아버지는 그를 몹시 반겼지만 양어머니와 세 동생은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건 신 의원이 미국 도착 1년 만에 초등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통과했을 때부터였다.

“나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영어 단어를 익혀도 다음 단어로 넘어가기 전에 잊어버렸다. 내 머릿속에 새는 곳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머릿속은 금세 비워졌다. 뭔가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도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잊어버렸다.”

하루 3시간씩 자면서도 집에 부담이 되지 않으려 인근 과수원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의 게으름을 채찍질한 건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신 의원을 감싸며 늘 이 말을 되풀이했다.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고교 졸업장을 받던 날, 신 의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가장 기뻤던 건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자부심이었다. 그분들의 아낌없는 지지는 내가 한 가족임을 느끼게 해줬다.”

이후 신 의원은 브리검영대와 피츠버그대(국제관계학)를 거쳐 워싱턴대에서 인문학 석·박사 학위를 차례로 따냈다. 메릴랜드대와 하와이대 교수 생활 중 1992년 워싱턴주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1998년 이후 지금까지 워싱턴주 상원에서 5선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아버지 레이 폴도 이런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1986년 5월 2일 컴퓨터사업 실패로 아버지가 지고 있던 큰 빚을 신 의원이 양로원 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탕감해주던 날,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 아들 폴을 미국으로 데려올 때 많은 이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전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소년이 성장해 제가 상상치도 못했던 방식으로 감사를 하네요. 그는 제 짐을 기꺼이 자기 것처럼 여겼고, 해결해줬습니다.”

노인이 청년에게

그로부터 얼마 안돼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신 의원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누운 아버지 묘비에 이렇게 적었다. ‘놀라우신 분, 내 아버지여(Amazing Man Whom I Call My Father).’

어머니는 신 의원 입양에 맞춰 이사했던 그 집에 살고 있다.

“지금도 어머니께 1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드립니다. 지난해 어머니께 혹시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것)가 있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터키에 가보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어 못 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제 집사람에게 얘기했더니 모시고 가자고 하더군요. 지난해 바르셀로나, 이스탄불을 거쳐 베네치아에서 끝나는 2주간 여행을 다녀왔어요. 길이 험하면 제가 업어드리곤 했는데 거기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에요’ 하셨어요. 그러자 그 사람들이 하나도 안 닮았다고 하는데, 어머닌 ‘그래도 내 아들이야(He’s my son anyway!)’ 하시더군요.”

KTX에서 내린 뒤 서씨와 헤어진 신 의원은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이동했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그에게 친부모와 양부모에게서 모두 버림받은 서씨를 만난 소감을 물었다. 그는 “마태 얼굴을 보니 한이 있어 보입디다. 공부를 못해 한이 있고, 정체성을 몰라 한이 있습니다. 제가 도와줄 겁니다. 사랑해줄 거예요.”

왜 입양인 돕기에 열성인지도 물었다. 그는 8월 한 입양인 단체와 함께 북유럽의 한국인 입양아들을 만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저도 결점이 많습니다. 어려운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외로웠기 때문에 외로운 사람에게 동정을 느끼고, 불쌍했기 때문에 불쌍한 아이들을 돕습니다. 1986년 제 생부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고향인 파주 금촌동사무소를 통해 아버지를 찾으니 계모와 이복동생 5명이 나타나더군요. 가져간 선물을 내던지고 돌아오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왜 나는 버렸나 하는 한이었죠. 근데 가난에 찌든 그 동생들을 아내가 미국으로 초청해 공부시키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모시려 다시 가서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네 살 때 왜 절 버렸는지 답을 달라고 말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술에 취한 아버지가 울며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있겠니. 나는 그때 다른 동네 머슴으로 팔려갔고, 일본 징용도 갔었단다’ 그러시더군요. 저는 제가 옳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만 나쁜 놈이었습니다. 가족을 만드는 건 누군가의 선택도, 환경도 아닙니다. 결국 자신에게 있습니다.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는지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태도 그걸 깨달을 때까지 도울 생각입니다.”

대전=글·사진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