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14) 한국에 온 각 교파 선교사들
입력 2011-06-02 17:53
캐나다 선교사들도 눈부신 활동… 게일, 한국학 연구-하디, 교회부흥 큰 역할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미국북장로교, 호주빅토리아장로교, 그리고 미국남장로교에 이어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교회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897년 한국 선교에 동참키로 결의하고 1898년 9월 푸트(W R Foote·富斗一) 목사 부부, 그리어손(Dr. Robert G Grierson·具禮孫) 의사 부부, 그리고 맥래(D McRae·馬具禮) 목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함경도와 간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했고 후에는 원산 함흥 용정 등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세 분야에서 활동했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925년 감리교, 회중교회와 연합해 캐나다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anada)를 구성했는데, 당시 주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중 한 사람인 루터 영(Luther L Young·榮在馨)을 제외하고는 다 이 연합에 찬성해 1925년 이후에는 캐나나연합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활동했다.
비록 장로교회 선교사는 아니지만 캐나다인으로 내한한 첫 선교사는 게일(James S Gale·1863∼1937)이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출신인 그는 동 대학 기독교청년연합회(YMCA)의 파송으로 1888년 12월 내한했다. 서울, 송천(소래), 부산에서 활동했고 후에는 북장로교로 이적해 원산, 서울 등지에서 활동했다.
게일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풍습 등 한국학 연구와 저술로 큰 업적을 남겼다. 게일의 뒤를 이어 1890년 9월 내한한 의사 하디(Robert A Hardie·河鯉永)는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의사로, 전도자로,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1907년 전후 한국 교회 부흥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893년 12월에는 캐나다인 매켄지(William J Mckenzie)가 독립선교사로 내한,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설립하는 등 헌신적으로 일했으나 1895년 6월 23일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캐나다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동기가 됐다.
감리교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함께 한국 선교를 주도한 교파는 감리교회다. 미국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 북감리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5년 입국한 아펜젤러로 시작되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프랭클린 마샬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885년 2월 2일 북감리교 파울러(Fowler) 감독에게 안수를 받았다. 이튿날 한국으로 향해 2월 27일 요코하마를 거쳐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내한했다. 그해 5월 3일에는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1856∼1922) 내외와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itch Scranton·1832∼1929)이 입국했다.
서울 정동에 정착한 아펜젤러는 영어학교를 시작으로 한국 선교에 나섰고,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성경 번역, 신학교육, 문서 활동 등 다방면에서 한국 교회 형성에 기여했다. 1887년에는 존스(George Heber Jones)와 올링거(Franklin Ohlinger)가, 1889년에는 맥길(W B McGill)과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했다.
남감리회는 1896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1888년 미국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국 근대인물 중 신학을 공부한 첫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는 남감리회에 한국 선교를 요청했다. 그 결과 1895년 10월 18일 중국 주재 선교사 헨드릭스(E A Hendrix) 감독과 리드(C F Reid·李德)가 내한해 선교 가능성을 점검한 바 있다.
이듬해인 1896년 5월 리드가 한국 선교사로 내한함으로써 남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됐다. 1890년 내한했던 캐나다인 로버트 하디는 1898년에는 남감리회로 이적해 목사 안수를 받고 의료활동보다는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다.
여러 교파의 한국 선교
장로교와 감리교 외에도 1890년에는 영국성공회가 콜페(C J Corfe·高堯翰) 감독을 파송해 한국 선교에 동참했고, 미국침례교 선교 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폴링(E C Pauling) 가들라인(A Gadelinre) 등을 한국에 파송했는데, 재정난으로 1900년 사역을 중단했다. 이들의 사업은 독립선교사였던 캐나다인 펜윅(Fenwick)에게 이양되고 후일 침례교회의 모체가 됐다.
성결교는 1907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감리교적 배경에서 생성된 성결교회의 모체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인데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 Kilbourne)에 의해 창립됐다. 이들은 1905년 11월 일본 도쿄에 성서학원을 설립했는데 한국인 김상준과 정빈이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서울 종로 염곡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이 됐다.
구세군은 1908년부터 한국 선교를 시작했는데 한국에 온 첫 선교사는 호가드(R Hoggard·許加斗)였다. 그는 1908년 10월 1일 입국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고신대·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