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의 사계] 봄을 보낸다

입력 2011-06-01 21:33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는 신하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하고 낚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왕실 도서관인 천장각(天章閣) 주변에서 군신 간에 우의를 나누는 중국 송나라 전통을 재현한 것이다. 임금이 시를 지으면 신하들이 창화(唱和)하는 형식의 야외 파티다.

기록에 전하는 정조의 시는 이렇다. “이 자리에 원기가 다 모였으니/오늘은 온 집안이 봄이로구나/꽃나무는 겹겹이 서로 섞여 있고/못 물은 출렁출렁 싱그러워라/제군은 다 가까운 자리에 있으니/약간 취하는 것도 자연스러운데/작은 노 저으며 일제히 흥을 타서/궁궐 숲에 달 뜨기만 기다리누나.” 왕과 신료들이 모처럼 국사를 제쳐둔 채 술잔을 돌리며 봄의 정취를 즐긴 것이다.

봄이 왔나 싶더니 창덕궁 동궐마루의 붓꽃이 시들어버렸다. 비가 내렸는데도 꽃잎을 밀어 올릴 힘이 없으니 행색이 초췌하다. 붓꽃이 지면 봄이 물러나는 거다. 알뜰한 맹세가 없어도 봄날은 스스로 간다.

손수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