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와 어머니… 박희성 전 순천연향중 교장의 사모곡

입력 2011-06-01 20:23


말년의 어머니는 불수였다. 중풍을 맞고 반신이 마비됐다. 어머니는 미음을 빨대로 겨우 마셨는데 아들이 주는 무화과는 오물거리고 먹었다. 아들은 고등학교 윤리교사였다. 4남7녀 중 막내였고 아홉 번째 자식이었다. 무화과나무는 아들이 처자식과 사는 집에 있었다. 무화과는 무르고 달았다.

어머니를 뒤로하고 아들은 섬 근무를 자원했다. 주말에 육지로 나왔다. 집에서 거둔 무화과를 안고 달려가면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말을 못해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불수의 처지가 서러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화과는 해마다 열렸지만 어머니가 살아서 삼킨 것은 한 줌에 불과했다.

중풍

1986년 4월 중풍에 쓰러진 어머니는 77세였다. 어머니는 아홉 살 많은 아버지와 18세에 결혼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군청 산림과 공무원이었다. 전남 순천은 그때 군(郡)이었다. 어머니를 타지에 시집보낸 구례의 외할아버지는 지게질 중 압사했다. 외할머니도 단명했다. 어머니는 외동딸이었다.

아버지는 중년에 정미소를 했다. 어머니는 곡식을 남들에게 퍼 주다 아버지에게 맞았다. 동네에는 손자들을 키우는 할머니가 있었다. 장손의 이름을 붙인 것인지 ‘광일이 할머니’로 불렸다. 아들 내외는 한국전쟁 때 납북돼 생사가 전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광일이 할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돌봤다. 70년대 초 광일이 할머니가 더 늙어 광주의 요양원에서 죽어갈 때 어머니만 곁에 있었다.

어머니는 11남매를 뒷바라지했다. 노동을 쉬지 않았다. 아버지는 논밭을 늘리고 축사를 지었다. 동네 가축이 병들어 죽어도 어머니가 치는 닭과 돼지는 피둥피둥했다. 생전 어머니에겐 지문이 없었다.

85년 어머니는 왼다리가 부러졌다. 새벽 기도회를 가다 발을 헛디뎠다. 6개월간 꼼짝하지 못했다. 몸무게가 늘고 혈압이 올랐다. 어머니는 고혈압 환자였다. 혈압 낮추는 약을 병원에서 타 먹었는데 당시 복용을 며칠 걸렀다. 이듬해 봄, 어머니는 평생 다닌 순천중앙교회에서 잠들듯 쓰러졌다.

어머니는 누워서 6년 2개월을 살았다. 한의사를 집으로 불러 침을 놓다 서울 경희의료원으로 옮겼다. 1년쯤 뒤 순천 출신 의사가 “입원은 무의미하다. 고향에서 편히 모시는 게 낫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겼다. 집에서는 어머니가 누워만 있어도 함께 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순천에 내려가서 독감에 걸렸다.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87년 4월 먼저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1년 더 있다 낙향했다.

무화과

그 막내아들 박희성(67)씨는 아버지가 죽은 해 순천 조곡동에 집을 샀다. 장미꽃이 담벼락을 푸지게 덮은 단층 주택이었다. 어린 무화과나무 세 그루가 정원에 있었다. 키가 130㎝쯤 됐고 가지는 가늘었다. 순천공고 교사였던 박씨는 자취집과 학교를 오가다 장미에 끌렸다. 처자식이 서울에서 따로 살던 때였다.

박씨는 아내와 72년 결혼했다. 초등 교사였던 아내는 두 아들을 낳고 퇴직했다. 교사 부부로는 자녀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발령이 잦고 근무지는 전남 각지로 흩어졌다. 80년대 초 어수선한 호남 사정은 이주를 부추겼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있던 80년 5월 박씨 가족은 현지에 있었다. 집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총과 총알이 나뒹굴었다. 아내는 85년 초등학생 아들들과 서울로 이사했다.

순천에 남은 박씨는 부모 집에 얹혀살았다. 주말에만 상경해서 처자식을 봤다. 부모는 “부부가 찢어져 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역정을 냈다. 성화를 못 이겨 부모 집을 나왔다. 학교 인근 단칸방을 얻었다. 어머니는 그때 쓰러졌다. 박씨는 처자식의 생활비를 끊었다. 아내는 울며 내려왔다.

어머니는 88년 퇴원해 순천에 돌아왔다. 딸들이 구완했다. 박씨는 방과 후 어머니를 찾았다. 누이들과 몸을 씻기고 등에 소독약을 발랐다. 어머니는 누워만 있어서 등창이 자주 도졌다. 7월부터 무화과를 가져갔다. 무화과는 10월까지 열렸다. 결실 막바지 서리를 맞을 때쯤 가장 쫄깃하고 달았다.

거금도

박씨는 91년 전남 고흥 거금도에 들어갔다. 소록도를 마주보는 섬이었다. 유일한 고교인 금산종합고에서 윤리를 가르쳤다. 박씨는 앞서 아내가 서울로 갔을 때 퇴직을 고민했었다. 교직에 남기로 하고 유일한 살길은 교감, 교장이 되는 것이었다. 거금도 근무는 승진하려고 지원했다. 매주 월요일 새벽 고흥 녹동항에서 배를 탔고 주중엔 관사에서 살았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면 순천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쓰러지기 전 “나는 교장이고 장학관이고 다 필요 없다. 네가 한 곳에 정착해서 살면 좋겠다”고 했었다. 투병 중인 어머니를 두고 섬에 간 건 불효였다. 병상의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면 한마디만 간신히 했다. “주 안에서 함께하옵소서.” 중풍 이전에는 들은 적 없는 말이었다.

박씨는 섬에서 새벽 기도를 시작했다. 어머니 말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교회에서 할머니들은 엎드려 울고 있었다. 기도하며 눈물 콧물을 쏟던 그들은 어머니 같았다. 박씨는 교회에서 나와 대성통곡했다. 관사까지 길고 어두운 길을 걸으며 부모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박씨는 주말마다 어머니를 찾았다. 집에서 무화과를 거둬 갔다. 어머니는 아들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무화과가 열리지 않는 겨울과 봄은 길었다. 92년 초에도 무화과는 제철이 아니었다. 기다리다 못해 안주로 파는 마른 무화과를 사다 물에 불렸다. 물렁해진 것을 가져가 어머니 입에 넣었다. 어머니는 오물거리면서 울었다. 생전 마지막 무화과인 것을 어머니만 알았는지 모른다.

금요일이던 그해 6월 19일 누나가 섬 학교로 전화했다. 매곡동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숨이 가빴다. 호흡을 멈췄다 길게 내쉬기를 거듭했다. 반복은 곧 그쳤다. 염할 때 어머니 얼굴은 처녀처럼 맑았다. 순천 주암댐 근처 조계산 자락에 묻었다. 비석에 ‘주 안에서 함께하옵소서’라고 새겼다. 박씨는 섬에서 나오던 해 교감, 장학사 시험에 붙었다. 99년 전남 완도고 교장으로 승진했다.

향수

박씨는 2006년 7월 광주 월곡동 공원 일대를 산책 중이었다. 순천 연향중 교장으로 7년 재직하고 다음달 정년퇴임을 앞둔 때였다. 주택가 초입의 담장 너머로 무화과가 보였다. 마당 곳곳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2층 주택이었다. 순천 조곡동 집을 보는 듯했다. 박씨 가족은 96년 조곡동 집에서 나왔다.

월곡동 집은 마침 매물이었다. 박씨는 일주일 만에 그 집을 샀다. 아내와 상의하지 않았다. 아내는 도심의 아파트에 살자고 했었다. 돈은 집주인이 달라는 대로 줬다. 시세보다 더 쓴 500만원은 향수를 사는 대가였다. 부부싸움을 크게 했다. 만남과 이별이 그 무렵 뒤섞였다. 장남이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둘째 아들이 중국인 아내를 맞았다. 박씨의 막내 여동생은 벚꽃구경을 나섰다 후진하던 남편 차에 치어 사망했다. 여동생도 교사였다. 둘째 아들 내외는 월곡동 집에서 한동안 살았다.

지난달 26일 박씨의 집 마당은 꽃과 수풀로 빽빽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8m 길이의 좁은 길만 오솔길처럼 맨땅을 드러냈다. 초목은 264.5m²(80평) 집 면적을 두른 분홍색 담장을 넘었다. 선홍색 장미는 무성한 진초록 넝쿨 위를 떠다니듯 수백 송이가 담장 밖으로 흘러넘쳤다.

무화과나무는 세 그루가 정원에 흩어져 있었다. 박씨가 말했다. “매년 무화과가 열릴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와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죠. 어머니 기도로 제가 지금껏 살았어요.”

이사한 지 5년이다. 아내에게 아직 혼나는지 물었다. “지금은 저보다 아내가 이 집을 더 좋아해요. 탐내는 사람이 많아서 팔까 한 적이 있는데 아내가 자기 죽을 때까지 못 판다면서 반대하더라고요.”

아내 공경재(64)씨는 2001년 교직에 복귀했다가 2009년 정년퇴임했다. 공씨가 다과를 내왔다. “남편은 무화과에 얽힌 향수가 깊어요. 올해 무화과가 곧 열릴 텐데 남편은 또 어머님 생각에 빠지겠죠.”

■ 무화과

성경에서 번영과 멸망을 함께 상징한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번성한 솔로몬 왕 집권기를 ‘무화과나무 아래’로 묘사했다. 신약에서 예수는 잎사귀뿐인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했다. 무화과나무의 가치를 가르는 것은 열매다. 무화과나무는 꽃말이 ‘풍요’일 정도로 열매를 많이 맺는 식물이다. 결실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구약에서 다윗 왕은 굶주린 적의 종들에게 무화과를 먹여 원기를 회복시켰고, 이사야 선지자는 무화과를 종처에 발라 죽어가는 히스기야 왕을 살렸다.

광주(光州)=글 강창욱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