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머슴살이… 붕어빵 장사… 자식 일곱 다 잘 커줬지”
입력 2011-06-01 19:16
전북 장수군 조정니 할머니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교회 조정니(69) 권사는 어둡고 힘든 터널 같은 세상을 살았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의 분위기 메이커, ‘웃음 전도사’로 교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귀한 사람이 됐다. 남편 고정기 은퇴 장로는 장로 가운데 유일하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교회 봉사를 최우선으로 삼아 살고 있다. 이들 부부는 모범적인 삶으로 교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장로교단 남선교회에서 시상하는 모범가정상도 받았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평범한 농사꾼, 이름 없는 촌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집 머슴살이, 붕어빵 장사, 식당 일을 하면서도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모두 교육시켜 신앙생활 잘하는 충성된 일꾼으로 양육했다. 이제 조 권사는 자신 있게 말한다. “우리 집은 예수 믿고 출세한 집이에요.”
고아와 다름없었던 어린 시절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돌아가신 것도 몰랐어요. 얼풋이 한 가지는 생각이 나드만요. 딴 것은 모르는디 뒷목에 뉘어놓고 하얀 면포로 덮어놨더라고. 덮어놨는데 새까만 머리 올린 건 지금도 눈에 있어요. 그거만 기억하는데 항상 언니가 그랬어요. 그때 마음이 아팠다고. 거기 가서 내가 젖을 빨아 먹더래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온 게로 동해물과 노래를 부름서나<부르면서> 그전에 꼬장<고쟁이> 중에 밑 터진 옷을 입었어요. 그런 걸 입고 다리를 우줄우줄 하면서 ‘동해물과∼’ 막 손을 흔들면서 부르더래요. 그리고 나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기침 해소로 가신 거 같아요.
고모가 젊어서 혼자됐어요. 고모부가 진안읍에서 작은 각시를 얻은 게로 친정으로 온 거야. 젊어서 혼자돼 갖고 우리를 거두느라고 재가를 못 갔어요. 언니 하나, 오빠 둘, 나 너이나 된 게로. 그렁게로 우릴 키우면서 고모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눈물을 글썽이신다). 농사지으면서 살았어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그렇게 된게 친구가 없어요. 친구가 없은게로 나보다 세 살 다섯 살 더 먹은 언니들은 나보러 불쌍하다고 잘해줘요. 그런데 친구들은 깐<깔보다>을 봐요. 나를. 그렁게로 맨날 뚜드려 맞고. 비 들고 혼자 놀고. 그전에는 그러더라고요(서러움에 복받쳐 울먹이신다). 앞에 있는 아가 나보다 두 살을 더 먹었는데 갸가 학교를 갔어. 나는 그때 여섯 살인가 여덟 살인가. 하여튼 그전에는 학교를 보통 열 살, 열한 살 먹어서 가잖아. 여덟 살인가 먹어서 학교를 들어갔는디 아무것도 모르고 갔는디.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려요. 학교서 야는 공부를 안 시켜도 친구 땜에 왔다 이걸 알았는가 숙제를 안 해갖고 와도 나를 때리도 않고 혼을 안 내요. 선생이 맨날맨날. 근데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가방 들고 아이들 따라다니는 거예요 내가. 따라댕기면서 애들이 토끼풀 뜯으라고 하면 토끼풀 뜯고. 가방만 짊어지고 왔다갔다 한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지.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돌아가시고 난게로 오빠도 학교를 안 가고. 우리 때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도 돈을 내고 댕겼어요.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는 그렇게 댕겼는데 아버지 돌아가신게 오빠들도 학교를 못 가고. 큰언니는 아예 학교를 안 갔고. 하나는 5학년까지 댕기고 하나는 3학년이나 댕기고. 나는 들어갔다가 2학기 동짓달에 못 간거요. 집에서 고아같이 살다가 열댓 살 때쯤 올케 들어올 때 고모는 돌아가시고 올케 밑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서럽게 살았지요.
먹고살기 위해 교회에 나가다
장로님(남편)은 진안군 백운면에서 태어났어요. 진안에서도 산골짜기에요. 저는 읍 근처인 진안군 상전면에서 태어났고요. 장로님은 저보다 일곱 살 많아요. 근데 너무너무 없는 집으로 시집왔어요. 장로님은 딸 셋, 아들 셋 중 둘째였어요. 형님 하나 있고. 옛날에는 속아서 결혼해요. 동네사람이 중매를 했는데 논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불쌍한게 사람들이 많이 중매했어요. 믿는 사람이 나서면 우리는 형제간도 없고 이렇게 밖인디 하나가 예수 믿으면 제사 때도 안 와 외롭다고 오빠가 죽어도 결혼을 안 시켜요. 근데 장로님 집은 믿는 집은 아니야. 가서 보니께 너무 없는 거요. 배가 고플 정도로 없어요. 품 팔아서 열세 식구가 살더라고. 큰시숙 장가가서 그 집 식구까지. 어머니 아버지 손주가 서이나 되고.
이춘희 권사님이 살았는데 방을 줄 테니 농사는 나눠 먹되 그 집 가서 마당도 쓸어주고 나무도 없으면 들여놔주고 그런 일을 하래요. 그런데 조건이 꼭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어요. 우리 집은 종교 때문에 결혼도 안 시켰는데 못 간다고. 시숙이 웃으시면서 “제수씨 거기 가서 평생 예수 믿을라고요? 그냥 믿는 척하고 마음은 안 믿어도 돼요” 그러더라고. 시숙이랑 시부모 다 있는데 내가 그건 아니라고 그랬어요. 한 번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 끝까지 믿어야 하고 그래 안 하면 시방 안 갈란다고 그랬어요. 그러니 시숙이 맘대로 해래요. 먹고살 것이 없응게 어쩌요. 그래서 장수 신기 그 집으로 가까고 할 수 없이 이 권사님이 세우고 운영하는 교회를 댕겼어요. 처음부터 권사님이 세운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서 올바로 배웠어요. 목사님들이 오시면 그렇게 대접을 잘하고 교역자들을 섬기는 걸 많이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옛날부터 나를 예뻐하셨던 거 같아요. 큰집에서는 1년 살고 이춘희 권사님 댁에서는 5년 살았어요.
우리가 거기서 딸을 낳아가지고 여섯 살이나 먹응게로 학교를 다녀야 되겠는데 한쪽은 도랑이고 한쪽은 물 들어가는 둑이 있어서 학교 다니기에 위험하겠더라고요. 장로님이 무조건 방 하나만 있으면 넘의 집에 살든 식모로 살든 간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장수교회 김재만 목사님이 혹시 나오고 싶은 마음은 없냐고 그랴. 긍게 장로님이 간다고 그랴. 과수원 하는 집사님 집인데 거기 가서 하루에 얼마씩 일당을 쳐서 주고 일년에 얼마 일을 해주고 나머지는 낭중에<나중에> 돈으로 가을에 준다고. 거기서는 사람만 착실하면 한다고 그래요. 갔다 오더니 이사 가는 날을 받아갖고 왔더라고요. 장수읍으로 이사 온게로 방이고 어디고 풀만 막 피어서 와서 고생 많이 했어요. 딸 둘이 있었는데 애들이 손이 얼고 막 그랬어요. 큰딸이 여기 와서 국민학교를 들어갔어요. 산에 가서 나무를 허 갖고 나무를 파는 거예요. 과수원에서 머슴살이 하면서 목사님 열심히 섬겼어요. 목사님이 우리를 예뻐하고 목사님을 의지하고 왔응게로. 목사님이 우리한테 잘했어요. 목사님이 대심방을 하거나 뭘 하거나 내가 애기 업고 가서 김치거리도 혼자 다 해놓고. 여행을 가시면 밥 다해서 학생들 먹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다
딸 여섯을 낳고 아들을 낳았는디 아들이 공부를 안 해요. 마라톤만 하고. 근데 내가 죽어도 못하게 한게로 모르게 했던가벼. 내가 그것을 못하게 막았어요. 공부 시키려는 욕심에. 내가 못 배웠응게로 애들만 가르칠라고 그것만 신경 썼어요. 내가 애를 무섭게 키웠어요. 나는 어렸을 때 누가 잡아주지 않고 어디 갔다 오면 엄마들한테 혼나는 게 그렇게 좋아비더라고. 잘못하면 혼도 나는데. 난 혼자 산게로 너무나 그것이 속이 상하더라고. 나는 자식 키우면 올바로 가르쳐야지.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마음속에 항상 있어갖고 컸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인가 아들이 선수 나간다고 해요.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교회 밑에 선생님이 살았었어요. “선생님 나 딸 여섯이어요. 아들 하난디 나 달음박질 그 힘든 거 안 시키고 싶어요.” 그 집이도 딸이 다섯인가 됐는디 아들 하나예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잘 압니다. 어쩌겄어요. 이번만 갔다 오면 제가 빼줄게요.”
영 안 빼주는 거예요. 누구한테 얘기도 않고 선생님하고 짜고 서울학교를 알아갖고 제가 그냥 내일 가는데 오늘 알려갖고 끌고 갔어요. 내가 참 지혜 없는 짓을 했어요. 전학을 갔어요. 기왕 갈라면 국민학교 때부터 가야 거기서 공부해서 고등학교를 나와야 대학교를 간다고 생각이 나서 저그 누나보고 데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거가 있는데 누가 잡아줘야지. 누나들은 다 회사가지. 혼자 두고 돈만 준게 지멋대로 도는 거요. 참 추잡스러운 얘기여. 지멋대로 돌아댕기는 거여 머슴애가. 그러니까 깡패들 축으로 야가 들어가버렸어. 중학교 때인데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 야를 여기 놔두면 야는 착한데 가면 못 빠져나온게 데리고 가라고. 그래서 급작케 갔어. 선생님하고 이야기하는데 옆에서 친구가 듣고 야를 데리고 도망가버렸어. 그 반에서 서인가 너이가 도망갔는디 선생님이 다 알더만. 그 집 애들 아주 내 논 아들이라고. 다른 애 부모들은 찾으러 다니고 나는 타관사람이라 서울 길도 몰라 오라면 오고. 나는 어디 가서 라면 하나라도 훔쳐 먹지 말고 배고파도 참고 있으면 했어요. 아흐레를 기둘렸어, 그때는 기도할 줄도 몰랐어, 교회는 다니고 있었지만 글을 모릉게 늘 부족한거여. 경찰서에 있다고 찾아가라고 해서 갔더니만 라면 한 개 안 훔쳐 먹었더라고. 바로 거기서 끌고 와버렸어요.
여기 와갖고는 자전거도 못 타는 놈이 친구 할아버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산골째기서 밭으로 떨어져서 119에 실려 병원으로 갔어요. 가서 본게로 다리가 아주 부러진 거야. 수술하고 하루 저녁 잤는데 병원비가 300만원이 나왔대요. 300만원이 얼마나 커요. 수술한 사람 붙잡고 울었어요. “나 돈 좀 깎아줘요” 그런데 이건 보험이 안 된다고 안 된대. 300만원 주고 나니께 거기는 비싸서 못 있겄어. 누가 쪼까난 병원 있는데 거기는 싸다고 해서 나온다고 하니 병원에서 깜짝 놀라. 자식 병신 만들라고 한다고. 이런 부모가 어딨냐고 하길래 “부모도 돈 있어야지 하지. 여기 있으면 돈 많이 나와서 딴 데 가서 살릴라고 한다”고 말했드니 링거까지 다 빼고 가래요.
의료공단으로 돈을 치르러 간게 왜 돈이 이렇게 많이 나왔냐고 물어서 보험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 하니 아니라고 가서 따지라고 해요. 원무과 직원한테 따져 돌려받았어요. 하나님이 돈을 그렇게 주시더라고요. 그 돈하고 논을 팔아서 서울에 아파트를 하나 샀어요. 논 다섯 마지기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했는데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결국 어찌어찌해서 하나님은 집 산 거 10원도 남기지 않고 다 뺏어 갔어요. 직장선교를 준비하던 셋째 딸이 엄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신앙생활만 하라고 했어요. 아들이 다치고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그때부터 새벽기도 안 빠지고 나온 거예요. 새벽기도를 가면 그렇게 할 말이 많아요. 지금도 교회만 오면 마음이 편해요.
매를 때리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매를 때려요. 매를 때리면서 다 때려요. 아들이 대학생 때 장로님이 일하러 갔는데 배가 아프다고 해 병원에 갔는데 큰 병원으로 가래요. 암이라고 해요. 목사님이 기도를 하라고 하세요. 수술하는 이가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하는데 딸이 들어와서 암이 아니래요. 물혹이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장로님은 계속 농사짓고 나는 붕어빵도 팔고 식당에서 일도 했어요.
근데 이제 내가 아픈 거예요. 2001년도에. 목욕을 하는데 가슴에서 고름이 나와요. 병원에 갔더니 초음파를 해보자고 해요. 그래서 내가 “암이요? 암이지요”라고 물으니 의사가 어떻게 그렇게 말이 수월하게 나오냐고 해서 난 암이 무섭지 않다고 웃었어요. 전주 병원에 가서 암인 거 다시 확인하고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했어요. 드러누워서 논게 참 좋았어요. 너무 좋은 거야. 그런데 항암주사를 맞은게로 토하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죽는 거야. 셋째가 회사를 그만두고 병구완을 했어요. 항암치료 8번하고 다 나섰어요. 의사가 할매가 살려면 가서 편하고 즐겁게 살라고 해요. 교회 다니냐고 물어봐서 댕긴다고 하니 신앙생활 잘하면 재발이 안 될 것이고 집에 가서 일하면 틀림없이 재발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신앙을 완전히 잡았어요. 아들 아프고 장로님 아파도 한번이라도 하나님 우리 어쩌요라고 안 해봤어요. 그래도 설마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때려서라도 고치시겠지 하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어요. 욕심이 안 생기는 게 너무 감사해요.
믿음의 가정을 세우다
친정이나 시집이나 믿는 사람은 나 하나예요. 긍게 내가 힘들었어요. 우리 시숙이 나보고 나가라 그랬어요. 왜냐. 없는 집에 와서 가시나들 가르친다고. 시숙 아이들은 교육을 안 시켰어요. 이혼하라고 난리였어요. 당신은 못 가르친 게로 질투가 나서 그러겠지. 그런 것이 판단이 후딱 와요. 동기간들한테도 핍박 많이 받았어요. 한번은 간게로 상 위에 십자가를 붙여놨어. 시숙님 교회 나가냐고 물어보니 나간대요. 시숙 생각에도 우리가 교회에 나가서 애들이 잘되고 화목하게 사니께. 주일성수 잘 지킨다고 해서 “시숙님 잘하셨네요. 구원받으셔서”라고 했어요. 시숙은 새벽기도를 하고 십일조도 냈대요. 막내 시누도 권사됐어요. 여섯 딸 시집 갈 때도 싸움하는 집만 가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은 우리 집이 영적으로 가장 잘됐어요. 1남 6녀가 다 잘살아요.
논 다섯 마지기만 있으면 사람들을 돕고 살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해달라고 항상 기도해요. 아이들한테는 선교를 많이 하라고 하고 목사님 잘 섬기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고 말해요. 그게 제 기도제목이에요.
■ 연보
1943년 전북 진안군 상전면에서 2남2녀의 막내딸로 태어남
1962년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 사는 고정기(당시 26세)씨와 결혼
1963년 전북 장수군 천천면 신기마을로 이사
1963년 이춘희 권사가 세운 교회 출석
1963년 큰딸 출생
1966년 둘째딸 출생
1968년 전북 장수군 장수읍으로 이사
1968년 장수교회 출석
1969년 셋째딸 출생
1972년 넷째딸 출생
1974년 다섯째딸 출생
1977년 여섯째딸 출생
1979년 아들 출생
■장수교회는
1910년 미국 남장로회 마로덕 선교사가 복음을 전파하며 장수읍교회를 세웠다. 35년 일제 탄압으로 예배당을 빼앗기고 현 위치의 청년회관을 인수,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76년 예배당을 새로 건축했다가 94년 전소돼 1996년 현 예배당을 건축했다. 현재 김영배 목사는 2004년 부임해 사역하고 있다. ‘교회다운 교회’란 비전을 키워가며 노인복지, 어린이보육, 빈민선교에 주력한다. 노인복지를 위해 경로대학, 도시락 서비스, 목욕 봉사, 주야간보호센터 등 장기요양보호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집에서는 99명의 어린이를 보육한다. 빈민선교를 위해 정부에서 위탁한 노동력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80∼90명의 재활교육을 감당하고 있다. 세례교인은 550명 정도로 장년만도 400명 이상이 출석한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139-1(063-351-9191).
장수=글 최영경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