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일본… 엘리베이터도 자판기도 멈췄다

입력 2011-05-31 22:04


원전 사태로 전력 공급 급감 日 여름철 초절전 모드

“정장을 입고 면접에 올 필요 없습니다. 면접관도 쿨비즈(Cool-Biz) 차림입니다.”

최근 신입사원을 선발한 소니와 후지쓰는 최종 면접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쿨비즈’ 차림으로 올 것을 공지했다.

쿨비즈란 영어 ‘시원하다’(cool)와 ‘사업·업무’(business)를 합친 말로 넥타이와 재킷을 생략한 간편한 복장을 뜻한다. 일본에선 매년 여름철인 6∼9월 관공서를 중심으로 이를 실시했다. 하지만 올해는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태 여파로 전력 공급이 급감하자 사회 전반에 걸쳐 쿨비즈를 채택하고 기간도 5∼10월로 확대했다.

나아가 일본 환경청은 지난 5월 중순 기존의 쿨비즈보다 훨씬 파격적인 ‘슈퍼(super) 쿨비즈’ 도입을 관공서와 기업들에 권유하고 나섰다. 슈퍼 쿨비즈는 상대방에게 실례인 반바지와 민소매 셔츠 같은 차림만 아니라면 용인하겠다는 것이다. 올 여름 사무실 에어컨 설정 온도를 28도로 권장한 상황에서 최대한 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일본 열도 전체가 전력 사용이 많은 여름이 다가오면서 ‘절전’ 모드에 돌입했다. 지하철역에선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제외하고 에스컬레이터 대부분이 멈췄다. 또 고층 건물이나 관공서는 엘리베이터 중 절반만 운행하고 상당수의 실내 전등을 껐다.

일본 명물인 자판기의 경우 도쿄에서는 판매 자체를 중단하거나 낮 시간대 6시간씩 냉각을 중지하고 있다. 회전초밥집의 회전 레일도 멈춰 섰다. 올 여름 정전에 따른 산업계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정부가 내건 15% 절전 방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일본 기업, 휴무 늘리기 근무 체계로=기업들은 공장 생산라인의 중단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다. 상당수의 기업들이 근무일과 근무시간대를 전면 조정함으로써 여름철 전력 수요를 줄이고 있다.

도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자동차업계는 오는 7∼9월 목·금요일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대신 토·일요일 공장을 가동한다고 지난 19일 발표했다. 또 통신업체 NTT도코모는 같은 기간 직원들의 휴무일을 토·일요일에서 월·화요일로 옮기기로 했다. 이 밖에도 일본 슬롯머신 업체와 패스트푸드 업체 등 적지 않은 기업들이 여름철 동안 지점들을 순번을 정해 임시 휴점을 하는 ‘순번제 휴업’을 실시하기로 했다.

전기 및 전자기기 제조업체인 도시바는 이미 4월에 노사협의를 열어 기존 휴일 계획을 백지화하고, 5월과 10월에 토요 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토요일 근무한 시간만큼 여름휴가를 늘리기로 했다. 또 상대적으로 전력이 남는 새벽과 심야의 조업 시간을 늘리고 낮 시간 조업을 줄이기로 했다. 카메라 업체인 니콘 역시 5월 초 휴일이 몰려 있는 골든위크를 반납한 대신 여름휴가를 늘리기로 했다.

일부 기업들의 경우 자체 ‘서머타임’을 도입하기도 했다. 즉 여름철 근무시간을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평상시보다 1시간씩 앞당긴 것이다. 통신업체인 KDDI와 소프트뱅크의 경우엔 재택(在宅)근무를 독려하고 있다.

기업 외에 관공서 학교 등도 여름휴가를 늘리거나 주중에 하루 쉬는 대신 토요일 근무제로 냉방 사용을 줄이고 있다.

대기업이나 일반 가정에 비해 절전 부담이 큰 선술집 등 소규모 점포들 중에는 최근 휴업을 하는 곳이 늘고 있다. 대지진 이후 직장인들의 귀가 시간이 빨라지면서 영업이 안 되는 데다 절전 압력과 전기료 인상이 영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

◇절전 상품 인기 및 절전 아이디어 봇물=일본 전력 소비의 30%를 차지하는 가정에서의 절전 아이디어도 백출하고 있다. 백열등을 LED전구로 교체하거나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구입하는 등 절전형 제품으로의 교체나 구입이 늘었다.

집의 온도를 낮추는 데 효과적인 ‘녹색커튼’ 만들기 붐도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녹색커튼은 여주, 수세미 등 덩굴식물을 이용해 햇빛을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각 지자체마다 주민들에게 묘목을 무료로 나눠주고 있는데, 신청자가 몰려 부족한 상태다.

일본 기업들 역시 절전제품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도시바는 충전용 배터리가 내장된 TV를 공개했다. 7월부터 판매되는 이 제품은 심야전력으로 충전한 뒤 전원 없이 3시간 시청이 가능하다. 원래 정전이 잦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지만 올 여름 일본의 제한송전에 대비해 내수용으로 투입됐다. 또 에어컨업체인 다이킨 공업은 여름철 전력 과소비의 주범인 에어컨의 사용을 PC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에어컨의 리모컨에 전력 사용 데이터를 저장해 매일 전력 요금 및 사용량을 파악함으로써 낭비를 막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절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 중단 등으로 전보다 많이 걷게 된 건 참을 만하지만 벌써 시작된 찜통더위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특히 어린이나 노인들이 있는 가정에서는 무조건 절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올해 길어진 여름휴가를 해외에서 보내는 것을 고려하는 가정이 많아졌다. 일본 여행사들은 발 빠르게 해외에서 2주에서 한 달간 체류할 수 있는 상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