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악마의 얼굴

입력 2011-05-30 17:45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2003년 작 ‘어벤저(Avenger)’는 현상금 사냥꾼 캘빈 덱스터가 보스니아 내전의 전쟁범죄자를 찾아내는 내용이다. 캐나다 백만장자의 외손자가 내전 중인 보스니아에 구호활동을 하러 갔다가 세르비아계에 참혹한 죽음을 당한다. 범인은 유고슬라비아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심복 조단 질리치. 월남전에서 땅굴 수색대로 활약한 덱스터가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은신처에 정글을 뚫고 접근해 질리치를 잡아 오기까지 포사이스 특유의 하드보일드(hard-boiled)가 독자의 숨을 막고 오금을 저리게 한다.

잔혹범죄 피해가족들은 대체로 가해자에게 동등 이상의 고통이 가해져 ‘탈리오(talion) 식 정의’가 구현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 사적 복수는 금지되어 있고, 아무리 잔혹한 범죄자라도 일단 구금이 되면 ‘가해자 인권’이라는 안전망이 씌워진다. 덱스터의 의뢰인은 범인을 처형하는 대신 법정에 세우도록 요구했다. 평생의 부자유와 가끔씩 양심의 가책을 받도록 하는 게 더 큰 고통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어벤저’의 타깃이 보스니아 내전(1992∼95)에서 날뛰었던 수많은 소(小)악마 중 한 명이라면 26일 붙잡힌 라트코 믈라디치는

‘빅 3’로 꼽히는 특급 전범이다. 세르비아계 군사령관이던 그는 스레브레니차에서 무슬림 약 8000명을 학살한 ‘인종 청소’의 집행자다. 나머지 둘은 밀로셰비치와 라도반 카라지치.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이던 밀로셰비치는 2001년 체포돼 재판 중 2006년 감옥 안에서 급사했다. 세르비아계의 괴수 카라지치는 2008년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다.

믈라디치는 세르비아 북부 마을의 친척 집에서 경찰에 체포될 때 권총 2정을 몸에 지니고 있었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한쪽 팔이 마비됐고 노쇠한 모습이었다. 가명을 썼을 뿐 수염 같은 위장술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도망 다니는 동안에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축구 경기를 보거나 고급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도 했고 딸의 무덤도 찾았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나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그의 각별한 근면성이 엄청난 악을 이행하는 데 관련 있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어떤 종파는 악인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악인정기(惡人正機)설을 펴기도 한다. 하기야 우리나라에도 “빈 라덴 사살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목청을 높인 언론이 있는 터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