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김산을 찾아서
입력 2011-05-30 17:43
1937년 초여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대장정의 종착지인 중국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서 중국공산당대회가 소집되었다. 일단의 외국인 취재진도 국민당의 삼엄한 경계선을 뚫고 그곳에 도착했다. 빼어난 미모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갓 서른 살의 미국인 전기 작가 헬렌 포스터 스노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대회 개최가 며칠 늦춰진다는 소식에 그녀는 옌안의 노신도서관으로 향한다.
영문서적을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던 그녀의 눈에 유난히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그 여름에만 수십 권에 이르는 영문서적을 빌려갔던 것이다. 대출 카드에 ‘장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스노는 사서에게 물었다. “장명이 누굽니까?” “조선인입니다. 지금 옌안 항일군정대학에서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지요.”
그녀는 만나기를 청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그에게 전달한다. 일주일 후 스노의 동굴 가옥으로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작가 스노와 10여개의 가명을 쓰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은 이렇게 만났다.
이달 중순, 황사를 씹으며 찾아간 노신도서관은 간판만 그렇게 붙어 있을 뿐, 스노가 김산을 처음으로 알게 된 옛 도서관은 아니었다. 옛 도서관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분리된,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창고 건물일 뿐이다. 김산이 친필로 ‘장명’이라고 적어 넣은 도서 대출카드라도 확인해보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서관 마당의 포플러 나무에 축구공만한 녹슨 종이 매달려 있었다. 그 종이 70여년 전 두 사람의 귀를 울리던 종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이 머릿속에서 물결쳤다.
41년 스노는 님 웨일스라는 필명으로 김산의 전기 ‘송 오브 아리랑(Song of Ariran)’을 뉴욕의 존 데이 출판사에서 출간한다. 그녀는 당시 조선해방동맹이 조선혁명가 대표로 옌안에 파견한 김산에게 매료되었던 것이다. 무려 22번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써내려간 전기를 읽어보면 김산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해 여름, 나는 수없이 일어나는 손의 경련을 이겨내면서 대략 25명이나 되는 혁명가들의 자서전을 썼는데, 김산은 내가 만났던 혁명가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공포를 모르고 독립심과 완전한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기 작가의 내적 비밀은 타인의 삶을 좇아가며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자기애로의 전환에 있을 것이다. 타인의 생애에 자신을 투영하며 마침내 전기적 대상에 대한 몰입의 힘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않았다면 ‘송 오브 아리랑’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산은 스노를 만난 지 1년 뒤인 38년 중국공산당 산시성 보안책임자 캉생(康生)에 의해 일제 스파이와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33살의 나이에 억울하게 총살당하고 만다. 생의 우연은 이렇듯 1년 뒤 목숨을 잃을 김산에게 영민하기 이를 데 없는 스노를 보내기도 한다. 김산 또한 스노에게 이렇게 털어놓고 있다. “당신은 내게 내 전기 작가로서의 영원성을 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원성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이 생에서 신에게로 다가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그 말을 이해하는 한 신의 속성으로부터 온 것이죠.”
생에 대한 관조가 진하게 묻어나는 이 말을 스노에게 영어로 전달할 수 있었던 김산의 지적 성숙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옌안은 스노만을 기억할 뿐, 중국공산당의 성지격인 옌안혁명기념관 어디에서도 김산의 존재를 알리는 문건 하나, 사진 한 장 찾아볼 수 없었다. 88년 산시성에서 스노 여사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전람회가 열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산은 83년 중국 당국에 의해 간신히 복권되었을 뿐, 현대 중국사에 이름 한 자도 올려놓지 못하고 있다. 노신도서관 마당에서 녹슬고 있는 종만큼이나 김산의 억울한 생애는 여전히 미완의 갈증을 느끼게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