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군인을 위하는 길
입력 2011-05-30 17:37
지난해 7월 19일 서울공항에 도착한 로버트 게이츠는 미 국방장관으로는 이례적으로 3박4일의 긴 체류 일정에 들어갔다. 게이츠 장관은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 비무장지대(DMZ) 방문, 천안함 46용사 참배, 청와대 만찬 등을 소화하며 공고한 한·미 군사동맹을 재확인했다. 그는 방한 일정을 마치자마자 인도네시아로 날아가 양국 군사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전례 없이 숨가쁜 일정을 끝낸 게이츠 장관은 23일 새벽 미국행 전용기에 올라 20시간 동안 메릴랜드 주에 있는 앤드루스 공군기지로 날아갔다. 그가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 것은 스탠리 매크리스털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의 전역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매크리스털은 잡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비판한 당사자로, 오바마 대통령이 “문민통제를 훼손했다”며 경질한 전시 사령관이었다.
舌禍 장군도 배려하는 미국
‘불경죄’를 저질러 물러나는 인사의 전역식에서 게이츠 장관은 야전군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듬뿍 담은 연설을 했다. “자부심과 슬픔을 담아 감히 그를 떠나보냅니다. 미국은 그에게 커다란 빚을 졌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전사로 남을 겁니다.” 수많은 미국 장병들이 그의 연설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매크리스털에 대한 미 정부의 배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역한 지 8개월 남짓한 지난 4월 그를 백악관 자문위원으로 선임했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4성 장군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조치로 평가할 만하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어땠을까. 나랏일을 보러 해외에 나간 국방장관이 게이츠 장관처럼 새벽잠까지 설치며 귀국길을 재촉하지는 않았으리라. 하물며 설화(舌禍)로 대통령 눈 밖에 난 장군의 전역식이라면 더더욱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참석했다면 ‘대통령에게 개개느냐’ ‘눈치가 없다’는 등의 불호령과 비난이 쏟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은 살아 있는 장병만 챙기는 것이 아니다. 숨진 장병과 유가족들도 끔찍이 챙기고 보살핀다. 예를 들어보자.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프랭크 버클스는 올해 110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는 무공훈장을 받은 적 없는 무명용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유해는 1차 세계대전 영웅인 존 퍼싱 원수 묘역 바로 옆에 안장됐다. 지난 3월 열린 버클스 하관식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다른 국사를 제쳐놓고 참석했다. 미국 전역의 공공기관, 해외 미국 공관, 미군 함정에는 조기(弔旗)를 걸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적진에서 날아온 수류탄 위에 몸을 던져 동료들을 구하고 산화한 헨리 스벨라 일병의 여동생 도로시 매튜스에게 올 초 전화를 걸었다. 오빠에게 훈장을 추서한다는 방침을 대통령이 전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다음날 첫 행사로 전사자 2명의 유족에게 미군 최고 영예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전달했다. 60년 만에 오빠의 무공을 전해 듣고 울먹이는 백발의 매튜스를 오바마 대통령이 포옹하는 장면을 미국인은 잊을 수 있을까.
유족을 위로하는 통수권자
우리는 어떤가.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가 발굴되면 대개 전화나 우편으로 유족에게 통지했었다. 그러다 지난해 말 군 관계자가 유족을 방문해 통보하도록 전사통보 절차를 바꿨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국방부는 최근 한국전쟁 전사자 624명의 유족을 찾아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유족을 찾아주지 못한 전사자가 1만7000여명, 수습하지 못한 유해는 13만여 위(位)에 달한다. 국방부는 유해 발굴 작업과 유가족 찾아주기 활동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관련 예산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국민은 우리나라에서도 전사자 유족을 품에 안고 다독이는 통수권자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전사자와 유족에 대한 정부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