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번역료는 150배?… 교묘해지는 리베이트
입력 2011-05-29 18:04
#1 신약 연구개발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는 한올바이오파마㈜는 2008년 2월 서울의 한 정형외과에 의학논문 요약본에 대한 번역을 의뢰했다. 제공한 번역료는 440만원. 한 단어에 1만5000원 정도로 계산됐다. 보통 단어당 100∼150원 정도를 쳐주는 시가의 150배 수준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결과 한올바이오파마는 이런 방식으로 2008년 1월∼지난해 9월 사이 모두 1444개 병·의원에 88억7300만원의 현금을 지급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고려대병원, 성모병원 등 유명 대학·종합병원들도 이런 특혜의 대상이었다.
#2 서울의 한 의원은 2008년 3월부터 1년간 ㈜태평양제약의 약품 449만여원 어치를 처방해줬다. 태평양제약은 그 대가로 87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제공했다. 매출액 20% 수준을 리베이트로 제공한 셈이다. 태평양제약은 개인병원은 물론 강북삼성병원, 서울아산병원 등 대형 종합병원 등 2101개 병원을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 2008년 1월∼2009년 6월 1년5개월여 동안 이렇게 제공한 상품권은 88억7600만원에 달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9일 태평양제약 등 9개 제약회사의 리베이트(부당판촉활동) 행위를 적발해 29억6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시정조치명령을 내렸다.
공정위 조사 결과 해당 업체들은 2006∼2010년간 병·의원들에 모두 401억9400만원 상당의 각종 이익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약품 수는 452개에 달했다.
제약사들은 중소 개인병원에는 TV,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을 설치해줌으로써 자사 약품 처방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포섭했다. 자사 의약품을 처방하거나 판매할 경우 상품권은 물론 현금까지 찔러줬다. 아예 병원에 의약품을 납품할 때 주는 일종의 ‘채택료’를 의미하는 ‘랜딩비(Landing)’라는 업계 용어까지 존재했다. ‘수금할인’ 방식도 등장했다. 신풍제약㈜은 서울의 한 유명 산부인과가 오테놀 크림 등 자사 의약품 4개를 판매한 대가로 625만원 가까운 외상 매출금 잔액을 탕감해줬다. 이런 식으로 610개 병원에 할인해준 매출금 잔액도 16억원에 달했다. 논문번역 일감을 의사에게 주고 번역료를 시가의 몇 십 배에서 많게는 100배도 넘게 치러준 제약사도 있었다. 현금과 상품권 지급, 식사·골프접대, 세미나 지원 등은 기본이었다.
리베이트를 받은 대상도 화려했다. 개인 병·의원뿐 아니라 서울아산병원, 서울대병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시립보라매병원, 길병원, 이대목동병원, 일산 백병원 등 대형 종합병원과 대학병원 대부분이 이번에 적발됐다. 지난해 11월 28일 개정된 법에 따르면 리베이트가 적발되면 제공한 쪽뿐 아니라 받은 쪽까지 처벌대상이지만, 이번에 적발된 사례들은 모두 지난해 11월 이전에 발생한 일이어서 리베이트를 받은 병·의원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
신동권 공정위 서울사무소장은 “지금도 신고와 제보 등이 이어지고 있어 조사를 계속 벌이고 있고, 향후 시정명령 이행 여부를 철저히 검토해 불이행시 검찰고발 등 강력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민영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