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자녀 잃으며 복음 심은 美 선교사들 열정이…
입력 2011-05-29 17:23
(13) 안동 경안고와 선교사 묘역
돌비석 하단은 ‘그는 죽지 않고 잠들었다(He is not dead but sleepeth)’고 영어로 새겨 있었다. 망자를 향해 부활 신앙을 담은 비문은 산 자를 위로했을 것이다. 지난 24일 찾은 가로 1.2m, 세로 2.5m 크기의 직사각형 무덤 세 기가 나란히 누운 경북 안동 금곡동 경안고등학교 초입 선교사 묘역은 양지였다.
핏덩이 묻고 전도하다
경안고 부지에는 1900년대 중반까지 외국인 선교사 가족이 살았다. 경안고는 54년 금곡동 108번지에 설립됐다. 그전에 죽은 선교사와 자녀가 집 앞 동산에 묻혔고 개교 후에도 교정에 남았다.
미국인 선교사 로저 얼 윈(Roger E. Winn·1882∼1922) 목사는 인노절(印魯節)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묻혔다. 동료 선교사 안대선(Wallaoe J. Anderson·1890∼1960) 옥호열(Harold Voelkel·1898∼1975) 목사의 어린 자녀도 비슷한 때에 죽어서 같은 곳에 장사됐다. 모두 이질로 병사했다. 이질은 가난한 안동을 휩쓴 풍토병이었다. 선교사인 아버지들은 아들과 딸을 묻고 다음 선교지로 떠나야 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된 인 목사는 경남 밀양과 부산에서 활동하다 1909년 안동으로 진출했다. 유교가 강한 안동은 경북 북부 선교 기지였다. 인 선교사는 20년 금곡동에 남녀 성경학교를 세우고 남자 성경학교장을 지냈다. 2년 뒤 그가 죽고 성경학교 기금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25년 학교 건물이 신축됐다. 아내는 여자 성경학교 강사로 활동하다 그해 귀국했다. 두 아들은 목사가 됐다.
안 목사는 안동을 근거지로 영주 의성 예천 청송을 전도했다. 교인 100여명을 확보하고 교회 학교를 운영했다. 그는 청년 운동에 주목했다. 3·1운동 이후 청년이 교회로 몰릴 때였다. 안 목사는 21년 안동교회에서 국내 첫 기독 청년 면려회(勉勵會)를 조직하고 전국 확산을 위해 이듬해 상경했다. 초교파 청년 신앙 운동이었다. 딸은 전임 직전 죽어서 남겨졌다. 안동은 면려회 운동의 개척지가 됐다.
옥 목사의 아들은 나자마자 흙이 됐다. 옥 목사는 39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일제에 추방당했다. 전쟁 종식 후 46년 돌아와 선교를 재개했다. 폐쇄된 교회 복구에 전념하다 서울로 전근됐다. 한국전쟁 때 미군 군목을 자원했다. 함흥 철수 작전에 참가해 북한 주민을 구출했다. 52년 석방된 반공 포로 50여명을 신학교에 입학시켰다. 장학금을 주고 목사로 배출했다. ‘반공 포로의 아버지’로 불렸다.
선교사는 살아 있었다
경안고는 2세대 안동 선교사가 세웠다. 학교 설립 모임은 53년 11월 반피득(Peter Vanlierop) 선교사의 집에서 소집됐다. 우열성(Stanton R. Wilson) 조운선(Olga C. Johnson) 선교사가 동참했다. 안동은 고교가 부족했고 재정은 열악해서 증설할 여력은 모자랐다. 중학교·공민학교 10곳, 고교는 5곳이었다. 고교가 중학교 졸업생을 다 수용하지 못했다. 학생들은 타 도시로 갈 형편이 아니었다.
이듬해 3월 경안고 첫 신입생 입학시험이 치러졌다. 각지에서 300여명이 몰려왔다. 미국 유학과 장학금 지원 등 특전이 있었다. 170명이 선발됐고 4월 입학식이 열렸다. 초대 교장은 재단 이사장인 반 선교사가 겸임했다. 교감은 안동 공립중 국어 교사였던 김인한 선생이 맡았다. 그는 경안고 설립 인가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우열성 조운선 선교사와 선교사의 아내들이 외국어를 가르쳤다.
반 선교사가 안동 선교사로 초임한 해는 49년이다. 그는 1918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경안고를 개교하고 안식년에 귀국했다. 현지 150개 교회를 돌며 경안고 휘장(徽章)을 증정하고 1만2000달러를 모금했다. 경안고 본관 신축에 썼다. 55년 돌아온 반 선교사는 이듬해 서울 연세대 교수로 발령났다. 아내 반애란(Eleanor C. Vanlierop) 여사는 서울 대신동에 미혼모 보호시설 애란원을 세웠다.
붉은 벽돌로 지은 경안고 본관 뒤 ‘경안역사관’은 여성인 조운선 선교사의 사택이었다. 조 선교사는 59년 정년퇴임하고 귀국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단층집은 경북 북부에서 선교사가 지은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았다. 선교사들이 읽던 책, 미군이 헬기로 공수했던 나팔 등이 진열돼 있었다.
경안고 본관은 본래 동산이었고 선교사들이 살던 큰 집이 있었다고 23회 졸업생인 교무부장 정휘동 교사가 설명했다. 집을 헐고 산을 깎아 교사를 지었고, 퍼낸 흙으로 구릉을 메워 운동장을 만들었다. 지난 24일 운동장에서는 교내 체육대회를 앞두고 예선전으로 맞붙은 학생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태진 재단 이사장 등 학교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미국 시카고의 요양원에 있는 반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생존 사실은 그해 4월 애란원 설립 50주년을 맞아 그들의 딸이 방한해 알게 됐다. 구순을 넘긴 반 선교사는 방에 병풍을 둘렀고 경안고를 기억했다. 헤어질 때 그는 한국말로 축도했다.
안동=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