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70) 암행어사 박문수 초상화

입력 2011-05-29 17:33


“암행어사 출두야∼!”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벌벌 떨게 했던 조선시대 어사(御使)의 대명사를 꼽으라면 단연 박문수(1691∼1756)일 겁니다. ‘춘향전’의 이몽룡이 남원사또 변학도의 생일잔치에 거지꼴로 나타나 모진 고문에 신음하던 춘향이를 살려낸 통쾌한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이건 소설에 불과하고 실존 인물은 박문수 만큼 잘 알려진 경우도 없을 겁니다.

암행어사란 임금이 지방 관리들의 행동과 백성들의 생활을 알아보기 위해 몰래 보낸 관리로, 대개 정직한 선비 중에서 뽑았답니다. 본관이 고령(高靈)이며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인 박문수는 영조 때의 암행어사로 숱한 무용담을 남겼답니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 사색당파가 극심한 시절이었기에 그의 역할이 빛난 것일 수도 있겠죠.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나섰답니다. 1년 후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으나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삭직당하고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관리들을 적발했습니다. 이듬해 이인좌의 난 때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우기도 했지요.

항상 거지차림으로 활동했다는 그는 탐관오리에게는 인정사정없었으나 백성에게는 천민일지라도 관대했답니다.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박가라는 한 백정이 돈을 많이 모아 이방의 빚을 갚아 주고 작은 관직에 오르자 진주 양반들이 들고 일어났답니다. 결국 쫓겨난 박가는 억울한 심정에 박문수가 조카라고 했고, 박가의 사정을 들은 어사는 진짜 조카가 돼주는 일도 있었다지요.

그러나 소론 출신인 그는 노론의 견제로 풍파도 많이 겪었습니다. 1737년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豊德府使)로 좌천되고,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가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내려가고, 1752년 세손이 죽자 세손의 스승이자 약방제조 책임자로 추궁을 당해 제주로 귀향을 가기도 했답니다.

박문수의 초상화는 천안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2점으로 1994년 모두 보물 제1189호로 지정됐답니다. 이 중 하나는 38세인 1728년 공신 녹훈을 하사받을 때 제작된 공신상(功臣像·사진)으로 학정금대(鶴頂金帶·학이 그려진 옷과 금으로 만든 띠)를 착용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노년의 초상화로 1품관이 착용하는 서대(犀帶·무소의 뿔로 만든 띠)를 하고 있답니다.

국립공주박물관(관장 김승희)은 공주시(시장 이준원)와 공동으로 공주지역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공주의 명가 2’를 7월 17일까지 개최합니다. 고령박씨 문중의 어사 박문수 초상 등 2009년 명가 전에서 소개하지 못한 13개 문중의 소장품 180여점이 선보인답니다. 온갖 부정비리가 판치는 요즘 사리사욕에 물들지 않은 박문수 같은 인물은 없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