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등록금 왜 “미쳤다” 하나… 등록금, 숫자와 철학 사이
입력 2011-05-26 19:57
우리나라 사립대학이 등록금을 스스로 책정하게 된 것은 1989년부터다. 그 전에는 문교부 장관이 해마다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결정됐다. 정부가 사립대 등록금까지 통제할 법적 근거는 없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했다. 교육비 경감과 물가 안정이란 명분이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는 제5공화국이었다.
정부 지침에 따라 등록금 고지서를 만들던 사립대학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87년 6·29선언 덕에 등록금 책정의 ‘자유’를 얻었다. 정권이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면서 내놓은 여러 조치에 ‘대학 자율화’가 포함됐다. 반정부 시위의 무대인 대학에 자유를 주는 것, 많은 사람이 환영했던 일이다.
먼저 대학원 등록금이 88년 자율화됐고, 89년부터 학부 등록금을 사립대학협의기구가 책정하다가, 92년 대학별 완전 자율화가 이뤄졌다. 그러니까 등록금 자율화는 학생들이 정권과 싸운 민주화운동의 성과물인 셈인데, 딱 20년 만에 학생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돼버렸다.
‘개나리 투쟁’에서 한나라당 정책으로
전북대 교육학과 반상진 교수는 89년 등록금 자율화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자유라는 가치가 부각됐다. 사립대학들이 국가 통제에 반기를 들고 정부에 여러 자율화 조치를 요구하며 등록금 책정 자율화를 끼워 넣었다. 사실상 등록금 인상 자율화였다. 등록금은 국가의 몫이냐, 개인의 몫이냐. 등록금 정책의 철학에 대한 논의가 있긴 했지만 자유라는 거대 가치에 묻혀버렸다. 대학들이 등록금 올리기 위해 자율화 흐름을 악용했다고 본다.”
사립대학들은 90년 등록금을 11.8% 인상했다. 91년부터 96년까지, 15.5%, 16.2%, 13.5%, 14.6%, 13.7% 등 7년 연속 10% 이상 올렸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겪은 98, 99년 정부가 개입해 거의 동결된 인상률은 2000년 9.6%로 껑충 뛰더니 2008년까지 5% 이상을 유지했다(2009, 2010년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정부가 개입해 0.4%와 1.6%에 그쳤다).
학생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등록금 시위’를 벌였다. 개나리 필 무렵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어김없이 시위가 벌어져서 ‘개나리 투쟁’이라 했다. 당시 학생들은 등록금이 비싸다고 주장하기 위해 물가와 비교했다. 지난 10년간 소비자 물가는 36.8%, 사립대 등록금은 70.1% 올랐다.
개나리 꽃망울은 봄을 넘기지 못한다. 세계 100위 안에 드는 대학이 없다거나, 한국 경제규모에 비해 대학 경쟁력이 너무 떨어진다거나, 세계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을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 앞에서 ‘물가 상승률’을 내세운 개나리 투쟁은 힘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생긴 건 2006년이었다. 반상진 교수의 말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간하는 회원국 교육지표(Education at a Glance)에 2006년부터 대학 등록금 통계가 포함됐다. 나도 2007년 지표를 분석해 논문을 썼는데, 한국 등록금이 예상보다 너무 비싼 거여서 깜짝 놀랐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비싸다는 사실이 객관적 자료로 확인된 것이다. ‘물가보다 많이 올랐다’와 ‘세계 두 번째로 비싸다’는 사람들이 느끼는 강도가 다르다.”
어쩌면 OECD란 국제기구가 한국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이 등록금 자료일지도 모른다. OECD 통계가 공개되면서 ‘등록금 투쟁’은 ‘등록금 연구’가 됐다.
한국대학교육연구소는 올 초 310쪽짜리 책 ‘미친 등록금의 나라’를 펴냈다. 연구원 7명이 지난해 1년을 꼬박 매달려 책 한 권을 쓸 정도의 주제가 된 것이다.
저자 중 한 명인 임희성 연구원은 “그동안 등록금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문제였다. 모두가 비싸다고 느끼지만 얼마나 비싼지, 왜 비싼지, 비싼 값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친 등록금’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등록금 시위의 상징어로 자리 잡았다(서울 광화문광장의 릴레이 1인 시위 피켓에도 이 표현이 매일 등장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한나라당이 “쇄신의 핵심”이라며 반값 등록금 정책을 들고 나왔다.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는 25일 라디오 연설에서 “교육이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부모가 자식에게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돈을 내라 한다면 그 부모를 우리는 어찌 보아야 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두 가지 등록금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등록금이 있다. 1년에 수천만원을 받는 미국식 등록금과 공짜에 가까운 유럽식 등록금. 모두 ‘선진화’를 이룬 곳인데 등록금 액수는 이렇게 다르다. 일부 국내 대학이 등록금의 적정선을 산출하겠다며 동원했던 ‘교육원가’ 개념으로는 이 차이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건국대 교육공학과 오성삼 교수는 이를 대학교육을 보는 시각의 차이라고 했다.
“대학교육의 수혜자가 국가냐, 개인이냐 하는 질문에 유럽은 국가, 미국은 개인이라고 답한 것이다. 유럽의 관점은 ‘국가가 유지되려면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런 인재를 양성하는 비용은 국가가 지불해야 한다’이고, 미국식 등록금에는 ‘대학교육은 개인의 선택이다. 자유시장 원리에 맡기면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유럽 대학은 원래 가난한 학생, 가난한 교수들로부터 시작됐다. 가톨릭교구, 지방 영주의 후원을 받는 지식인이 학생을 모집하거나, 배움을 갈구한 학생들이 조합을 만들어 교수를 초빙하던 게 대학의 시작이다. 교육비는 당연히 지식인층을 끌어들여 통치에 활용하려는 후원자가 부담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대학이 공공재(公共財)라면 미국에선 사적재(私的財)다.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는 과정에서 대학이 발달해 공익성보다 자율이 중요했다. 사립대학들이 자율적 운영권을 갖고 교육의 질을 경쟁하다보니 등록금이 비싸졌다.
이를 감당치 못하는 계층이 늘어나자 1950∼60년대 논쟁이 벌어졌다. 대학교육의 효율성과 기회균등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이냐. 미국의 해법은 사립대학 비싼 등록금을 놔두는 대신 학자금 대출과 장학금을 늘리고, 재정지원으로 주립대학 등록금을 낮추는 것이었다.
황우여 원내대표의 라디오 연설에도 이 두 가지 등록금 얘기가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대학교육을 무료로 시켜 젊은이들이 저축을 하게 합니다. 미국에서는 수업료를 빌려줘 젊은이들이 많은 빚을 떠안고 사회에 나갑니다. 우리는 비싼 등록금을 놔둔 채 학자금 대출로 보완하는 미국형 제도로 성큼 들어서고 있습니다.”
한국 등록금의 ‘철학’
임희성 연구원은 “우리나라 등록금 정책의 골격은 미국식인데, 완전한 미국식도 아니다. 미국식 등록금의 문제를 보완해주는 학자금 지원 정책이 갖춰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대학생 학자금 지원 예산은 1조5000억원(2008년 기준)쯤 된다. 이중 84.9%는 대출이다. 취업 후 상환토록 빌려주는 ‘든든학자금’처럼. 무상장학금과 근로장학금은 14.6%와 0.5%. 전체 대학생의 28.5%가 학자금 지원을 받는데, 무상장학금 받는 학생은 1.6%에 불과하다.
학자금 대출도 영국 호주 등은 이자가 거의 없지만, 한국 대학생은 이자의 이자가 붙는 복리로 계산해 갚는다. 임 연구원은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 10년 뒤 대학 가서 4년간 학자금 대출로 공부하면 얼마를 갚아야 하나, 등록금 인상률 등을 감안해 계산해 보니 억대가 되더라”고 했다.
장학금에는 성적이 좋아서 주는 ‘포상’과 가난한 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는 ‘보상’,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성적우수자를 위한 포상 장학금이다. 60∼70년대 너나없이 가난할 때 만들어진 장학금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서다.
오성삼 교수는 “그 시절엔 다 가난해서 성적우수자에게 장학금 주면 ‘보상’이 됐다. 가난한 영재가 장학금을 받았는데, 지금 가난한 영재가 얼마나 있나. 과외해야 영재 되는 시대다. 교육부가 대학에 ‘등록금 수입의 몇 %를 장학금으로 주라’고 한다. 대학들은 그 퍼센티지 채울 때 운동선수 끼워 넣고, 교직원 자녀 포함시킨다. 정말 필요한 학생이 장학금 받을 기회가 너무 부족하다”고 말했다.
1년 등록금이 1000만원에 육박하는데, 가난한 대학생이 시급 5000원 받으며 하루 4시간씩 일주일에 엿새를 ‘알바’해도 1년간 모을 수 있는 돈은 500만원뿐인 상황. 그래서 학자금 대출 받으면 취업해 복리로 갚아야 하는데, 청년 실업률은 갈수록 높아지는 나라에서 ‘반값 등록금’ 논쟁이 시작됐다.
반상진 교수는 “등록금 문제는 정부의 교육철학 부재에서 비롯됐다. 한국은 OECD 30개 회원국 중 GDP(국내총생산) 규모 9위인데, 고등교육 투자는 21위다. 등록금은 학생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와 대학이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의지의 문제, 우선순위의 문제다”라고 했다.
등록금은 철학이다. 50만원이든, 1000만원이든, 5000만원이든 등록금 액수는 사회 구성원들이 ‘우린 대학교육을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의하는 숫자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