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소아적 합리성에 매몰된 인간
입력 2011-05-26 22:08
이완용 평전/김윤희/한겨레출판
1909년 순종과 순행 때 이토 히로부미는 개성역에 환영 나온 대한제국민들이 태극기만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이완용에게 화를 냈다.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라고 지시했는데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완용은 이토에게 사죄했다. 이후 평남 중화역에 도착했을 때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노인이 일장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완용이 이토에게 말했다. “조선인이 일본 국기만 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조선인은 아직까지 국기에 대한 관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통감께서는 이렇게 사소한 일로 화를 내십니까?” 이토가 겸연쩍어했다.
이완용(1858∼1926). 매국노나 친일파라는 단어 외에 다른 표현이나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인물이다. ‘이완용 평전’은 한국인의 머릿속에 매국노로 각인된 이완용의 인생과 정치 역정을 되짚고 그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고찰한다.
저자인 김윤희 경원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서문에서 이완용을 탐욕스러운 인물도, 근대적 주권 개념이 없는 전통적인 인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합리적 근대인이었다고 평가한다. 일반인의 선입견을 과감히 깨뜨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니 흥미롭다.
“이완용은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적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왕과 국가, 개인과 민족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빚어질 때 이완용은 균열을 파열시켜 새 질서를 만들려고 용기를 내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미래’로 밀어내고 왕과 개인이 살아갈 현실을 끌어안으려 했다.”(13쪽)
저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완용의 모습도 보여준다. 명문 반가에 양자로 들어가 스물다섯에 과거에 급제한 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 들어간 일, 조선에서 맨 처음 주미공사를 파견했을 때 참찬관으로 임명돼 다녀온 뒤 근대적 인민 교육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고 실행한 일, 반일 색채를 띤 정동파의 수장으로 아관파천을 감행해 성공시키고 독립협회의 초대 위원장을 지낸 점 등은 구한말 근왕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점진적 개혁 성향을 드러낸 이완용의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김 교수는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에 조인한 이완용의 행위가 매국임은 부인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도 이완용의 친일은 권력을 지키려는 고종과의 의리를 지키며 “모든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시도였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이완용이 매국의 책임에 갇힌 ‘배제된 타자’였으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소속감을 지속시켜주는 기제로 작동해왔음을 역설한다.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최악의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느끼는 위안, “난 적어도 너와는 달라”하고 외칠 수 있는 대상의 존재였다는 것이다. 즉 이완용은 차별이나 불평등, 억압에 분노하기보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실리를 추구했다는 설명이다.
책은 지금까지 친일 매국노로만 알고 있던 이완용이 합리적 근대인의 면모도 갖추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완용의 이름 앞에 붙는 ‘매국노’란 수식어가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완용이 한일병합 이후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누린 역사적 사실은 아무리 해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