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5-26 17:47
‘주님 사랑 3단계 입맞춤’ 등 교회사 바꾼 중세 영성운동
중세 영성운동의 인물 성 베르나르도(1090∼1153)는 1115년 클레보에 시토회수도원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원장으로 지냈다. 그는 ‘아가서 주석(Song of Songs)’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3단계의 입맞춤으로 묘사하였다. 1단계는 예수의 발에 입맞춤하는(회개) 것이다. 이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기고 입 맞추면서 회개한 여인처럼 회개의 입맞춤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단계는 예수의 손에 입맞춤하는(믿음)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예수의 손에 입 맞추어야 한다. 마지막 3단계는 예수의 입에 입맞춤하는(사랑) 것이다. 사랑 충만, 성령 충만, 말씀 충만의 경지를 얻기 위해 예수의 입에 입 맞추어야 한다.
성 도미니크(1170∼1221)와 도미니컨운동이다. 사도 바울을 모델로 삼고, 설교로 사람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교단 설립을 허가받았다. 자기부정과 걸식수도의 원리를 채택하였다. 그가 죽을 때까지 수도원 수는 60개로 늘어났다. 주지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다.
‘주님의 개(Dominican)’란 이름의 뜻대로 진리를 외치면서 이단을 정죄하는 종교재판(inquisition)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알베르투스 마그너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등 많은 학자와 교황들을 배출하였다.
성 프란시스코(1182∼1226)는 아씨시의 옷감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성 다미안 교회를 복구하며,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한 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아버지가 없다고 강조하고 수도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아풀리아(Apulia) 전쟁에서 얻은 중병을 앓은 후에 회개하고 문둥병자들을 사랑하는 등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절대 청빈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민중을 중심으로 형제 수도사들을 모아들였고, 새들에게 설교하며 대화하기도 하였으며, 이리를 감화시키기도 하였다. 40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양손과 양발에 예수님의 못 자국이 나타나는 스티그마타(성흔·聖痕)가 생기기도 하였다.
플로리스의 요아킴(1145∼1202)은 세 시대를 구분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1기는 성부의 시대로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42대)의 시대로 율법의 시대, 유아기, 결혼의 시대(ordo conjugatorum)이다. 제2기는 성자의 시대로 그리스도에서 재림까지(42대)의 시대를 말하며 은혜의 시대, 청년기, 사제의 시대(ordo clericum)이다. 제3기는 성령의 시대를 말하며 재림 이후의 42대까지로 자유의 시대, 노년기, 수도사의 시대(ordo monachorum)이다.
마이스트 에크하르트(1260∼1327)는 신플라톤적 범신론의 영향을 받아 만물에 신이 존재함을 강조하였고,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불꽃을 말하였고, 그리스도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범신론적 경향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존 타울러, 존 슈타우피츠, 마르틴 루터 등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김홍기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