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 일렁일렁 청보리 익어가는 ‘시인의 마을’… 미당 서정주의 고향 고창 나들이

입력 2011-05-25 17:36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 서정주 ‘질마재의 노래’ 중에서

곰소만이 풍경화처럼 보이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의 진마마을은 미당 서정주가 태어난 시인의 마을이다.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소금꽃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마을에서 성장한 시인은 훗날 ‘질마재의 노래’라는 시에 고향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았다.

질마재는 마을 뒷산인 소요산 자락을 넘나드는 2㎞ 길이의 야트막한 고개다. 질마는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

질마재는 시인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길을 떠날 때 넘던 고개이자 진마마을 사람들이 해산물이나 소금을 지게에 지고 넘던 애환의 길이다. 옛 모습대로 복원한 시인의 초가집 생가와 폐교를 개조해 만든 미당시문학관이 위치한 진마마을에서 부안면 소재지를 연결하는 질마재는 포장도로로 바뀌어 옛길의 흔적은 희미하지만 곰소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옛날의 그 바람이다.

시인은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고 회고했다. 질마재 고갯마루를 스치는 솔바람이 바로 시인을 키운 바람이다. 짭조름한 소금기가 묻어나는 솔바람에는 그윽한 아카시아 향기와 청보리가 익는 향긋한 냄새가 섞여 시심을 불러일으킨다.

진마마을 맞은편의 안현리 돋음볕마을은 ‘국화꽃 마을’로 불린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노래한 ‘국화 옆에서’를 주제로 마을을 단장한 까닭이다. 집집마다 지붕과 담에 집주인의 얼굴과 국화꽃이 그려진 고샅길을 돌아 야트막한 구릉에 오르면 시인의 무덤이 나온다. 시인은 무서리가 내리는 가을에 노란 국화꽃이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자태로 구릉을 뒤덮는 꽃밭에 누워 고향 마을을 그리고 있다.

시인의 생가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인천강을 건너 선운사의 도솔암에 오르면 아직 지지 않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선운산 신록을 도화지 삼아 붉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철 이른 계절에 선운사를 찾았던 시인은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며 피지 않은 동백꽃을 아쉬워했다.

도솔암에서 조붓한 산길을 걸어 내원궁의 손바닥만한 마당에 서면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신록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순백의 꽃을 피운 조팝나무 군락은 일엽편주처럼 파도타기를 한다. 신록을 뚫고 우뚝 솟은 천마봉은 보기에도 아찔한 바위덩어리. 말발굽 형상의 바위 사이로 천마봉에 오르는 철계단이 아찔하다. 천마봉 너머는 서해의 해넘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낙조대.

고창에는 유난히 보리밭이 많다. 그 중에서도 공음면의 학원농장 청보리밭은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이 하늘과 맞닿아 이색적인 풍경을 그리는 곳. 이곳의 청보리밭은 학원농장 17만평을 비롯해 경관농업지구로 지정된 이웃마을 보리밭까지 모두 30여만평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구릉이 사방팔방으로 지평선을 그린다. 청보리밭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황톳길과 원두막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을 되찾는 동심의 공간.

초록색에서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오뉴월의 보리밭을 마주하면 괜스레 허기가 진다. 시인은 ‘보릿고개’라는 시에서 “사월 초파일 뻐꾹새 새로 울어/물든 청보리/깎인 수정같이 마른 네 몸에/오슬한 비취의 그리메를 드리우더니//어느만큼 갔느냐, 굶주리어 간 아이.//오월 단오는/네 발바닥 빛깔로 보리는 익어/우리 가슴마다 그 까슬한 가시라기를 비비는데…….”라며 배고팠던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고창은 전 세계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은 고장으로 화순 및 강화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창천을 따라 산재한 2000여기의 고인돌 중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도 1600여기. 고인돌의 전시장으로 불리는 고창에서도 전원범 시인의 생가마을인 고창읍 도산리의 북방식 고인돌만큼 잘 생긴 돌도 드물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도산리 고인돌은 넓은 판석 2개를 세로로 세우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로 수천년 동안 이끼보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시인에게 고인돌은 어떤 의미일까? 어릴 적부터 고인돌과 함께 살아온 시인은 “고인돌은 착한 조선의 사람들이 저승에서 긴 영원살이를 하다가 심심할 때면 불러서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부탁하던 마고 선녀의 집”이라고 말했다. 고인돌이 손자의 등을 긁어주는 할머니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손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고인돌박물관에서 산지형 저층습지로 복원된 운곡습지를 거쳐 운곡저수지에 이르는 3.4㎞ 길이의 오베이골 탐방로가 끝나는 곳에는 동양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눈길을 끈다. 운곡지석묘로 불리는 이 고인돌은 높이 5m에 둘레 16m, 무게는 무려 300여t. 어떻게 채석해서 어떻게 옮겨왔는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몇 해 전 고창군에서는 건장한 고등학생 100여명을 동원해 통나무를 깔고 10t 무게의 고인돌을 평지에서 끄는 시연회를 가졌다.

산술적으로 3000명을 동원하면 운곡지석묘를 옮길 수 있겠지만 지형 상 수천 명이 몇 줄로 늘어서서 경사가 급한 산기슭으로 집채만한 고인돌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고창 사람들이 ‘세계7대 불가사의’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고창=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