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첫무대 ‘희망 연주’… 기타 강사 강형재씨와 영락보린원 아이들

입력 2011-05-25 18:00


외줄을 쳐서 나는 소리는 ‘룽’이라고 들렸다. 통기타 소리를 옮긴 의성어는 다사하지만 정처 없었다. 기타는 휑한 몸통을 떨어 발성하는 악기다. 멀리 가지 못하고 악기 주변을 배회하는 음색은 거처와 세상의 경계를 맴도는 고아를 닮았다. 고혈한 아이들은 기타 소리와 동병상련한 것인지 모른다.

악단 이름을 룽(Roong)이라고 붙인 영락보린원 원생 8명이 지난 1일 서울 창전동 클럽 ‘리디안’에서 첫 무대에 섰다. 영락보린원은 후암동의 아동·청소년 양육시설이다. 중·고등학생인 룽은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 드럼, 전자 건반으로 합주했다. 통기타로 시작해 악기를 배운 지 1년여 만이었다.

친구와 영락보린원 관계자, 젊은 미술가들이 공연장을 채웠다. 조민혁(18)군이 록그룹 부활의 ‘사랑해서 사랑해서’를 불렀다.

“늘 거리를 혼자 걸었지/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너무 오래된 기억이지만/항상 나에게 넌 위로였어.”

고교 3학년인 조군은 2003년 초 두 살 터울 여동생과 영락보린원에 맡겨졌다. 부모가 2002년 겨울 이혼했다. 조군의 노래는 사랑 타령이 아니었다. 청중은 듣다 울었다.

룽 곁에는 강형재(38)씨가 있었다. 리디안 운영자이자 기타 강사다. 강씨는 영락보린원에 악기를 갖다 주고 무료로 원생을 가르쳤다. 동료 연주자들이 도왔다. “그 친구들은 어느 수강생보다 열정적이에요. 연주를 들으면 가슴에 욱하는 게 느껴지죠.” 19일 노고산동 교습소에서 강씨가 전했다. “룽을 가르치며 자극받았다”는 강씨는 과거사를 꺼냈다. 그는 전남 목포고 1학년이던 1989년 자퇴했다.

답이 없었다

학기 초, 5분 늦었다. 오전 8시30분까지 교실에 도착해야 했다. 볼기를 200대 맞았다. 학생 어깨까지 오는 몽둥이는 곤장에 가까웠다. 반장도 지각했다. “넌 그냥 들어가라.” 담임교사는 반장을 벌주지 않았다. 강씨만 교무실에 끌려가 꿇었다. 교사들이 오가며 머리를 쳤다. 강씨는 말없이 귀가했다.

다음날 아침 강씨는 등교하지 않았다. 담임교사가 찾아왔다. 학교에 가자며 호통 쳤다. 강씨는 버텼다. 어머니가 물었다. “왜 학교에 안 가려고 하니?” 배울 게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자퇴서를 쓰라면서도 집안 사정 탓이라고 적으랬다. 교사가 불이익당하지 않게 하라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보험설계사였다. 양장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79년 병사했다. 잘나가던 아버지의 양장점은 철시됐다. 어머니는 이 무렵 보험사에 취직했다. 1남3녀와 시어머니, 시동생을 부양했다. 시동생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어머니는 전세용 건물을 짓다 사기 당했다. 일곱 식구는 단칸방을 전전했다.

“이제 뭘 할 거니?” 어머니는 자퇴한 아들에게 물었다. 강씨는 돈을 벌겠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10만원을 받아 기차를 탔다. 경기도 수원역에 하차했다. 안개비가 내렸다. 가을 새벽이었다.

먹이고 재워주면 업종을 안 가렸다. 술집에서는 나이를 속이고 일했다. 업주는 미성년자인 걸 알면서 썼을 것이다. 어리면 값싸고 부리기 수월했다. 공장에선 최저생계비를 받으면서도 떼먹혔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으로 위안받았다. 조하문의 ‘사랑하는 우리’,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처럼 애처로운 노래에 끌렸다. 1년여 동안 수도권 일대 술집, 식당, 공장 등 6곳에서 일했다. 가족과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90년 겨울 ‘어린 나이에 뭐 하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집 생각이 났다.

기타를 배우다

91년 초 귀향했다. 가족은 아파트로 이사해 있었다. 살림은 나아져 보였고 어머니는 여전히 보험설계사였다. 집에 피아노가 생긴 걸 다음날 알았다. 어머니가 학사모를 쓴 사진이 거기 있었다. 어머니는 본래 중졸이었다. 자식을 뒷바라지하며 고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신학대를 졸업한 것이었다.

창피해서 공부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2000원씩 놓고 나갔다. 그 돈으로 검정고시 교재를 샀다. 그해 8월 고교 졸업 자격을 땄다. 친구들은 고3 여름방학이었다. 아들의 합격증을 본 어머니는 강권했다. “대학에 가라.” 거부할 수 없었다. 93년 목포과학대학 경영과에 입학했다. 장학금을 받았다.

대입을 준비할 때 통기타를 얻었다. 친구 누나의 기타였다. 친구는 누나가 시집가자 “노래 잘하는 형재에게 주자”며 가져왔다. 강씨는 입시 학원에서 만난 형에게 기타 코드(화음) 5개를 배웠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교 록그룹을 찾아갔다. 보컬(노래)을 하고 싶었다. 록그룹은 “이미 있다”며 거절했다. 강씨는 차선으로 통기타 동아리에 들었다. 어머니는 통기타를 사 주셨다. 강씨는 두 달여 만에 동아리를 나왔다. 빈 강의실을 돌며 노래했다. 8개월 뒤 록그룹 보컬이 입대하고 영입됐다. 공연 직후 연습실 앞엔 꽃다발과 편지, 김밥이 쌓였다. 여고생들이 놓고 간 것이었다.

96년 제대하고 상경했다. 음악학원인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기타를 배웠다. 헐리기 직전인 망원동 주택 지하방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했다. 피시(PC)통신 음악 동호회 회원에게 기타를 가르쳤다. 감미롭다는 뜻인 악단 ‘리디안(Lydian)’이 결성됐다. 주말마다 홍대 클럽을 옮겨 다니며 공연했다. 청중이 리디안 앞에 ‘아름다운 밴드’라는 수식을 붙였다. 98년 음반을 냈다.

바닥에서 도약하다

망가지기 시작했다. 불현듯 찾아온 회의감은 독기로 변했다. 클럽 공연을 훼방하고 술에 취해 탁자를 뒤엎었다. 노숙인과 지하철 바닥을 뒹굴고 행인과 싸웠다. 2002년 택시를 타고 목포로 도피했다. 보증금 500만원이 걸려 있던 영등포 연습실은 전화로 정리했다. 당시 수강생은 30여명이었다.

목포의 야산에서 독거했다. 술집 종업원이 간혹 사는 원룸이 있었다. 구멍가게도 걸어서 30분 걸렸다. 인근은 가로등이 적어 해가 지면 캄캄했다. 기타 교습으로 연명했다. 인터넷으로 광고했다.

머리카락을 서울에서부터 깎지 않았다. 오래 전 염색한 장발은 더 자라서 엉덩이까지 처졌다. 반은 노랗고 반은 검었다. “음악 하다 미쳐서 내려왔대.” 다들 수군거렸다. 강씨에게선 역한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목사가 됐다. 젊어서 번 돈으로 작은 교회를 세웠다. 어머니는 강씨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했다. 강씨는 생각했다. ‘내가 못났구나.’ 상황을 탓할 게 아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2003년 다시 상경했다. 친구들을 찾아가 사과했다. 일부는 이미 연락이 끊겼다. 홍익대 뒤 와우산에 원룸을 얻었다. 홍대로 진입하려니 산자락이 가장 쌌다. 인터넷으로 기타 수강생을 모집했다.

“공짜 클럽을 만들자.” 강씨가 수강생 6명에게 제안했다. 대관료만 받고 음식은 무료로 제공하자는 의견이었다. 6개월간 3450만원을 만들었다. 2006년 7월 7일 클럽 리디안이 창전동에 문을 열었다.

룽이 시작이다

영락보린원 사정은 지난해 초 기타를 배우던 대학원생에게서 들었다. 대기업이 악단을 만들어주기로 했다가 취소해 아이들 실망이 크다는 전언이었다. 대기업은 영락보린원에 기부했던 악기도 회수했다고 했다. 대학원생은 영락보린원에서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강씨가 돕겠다고 했다. 통기타 6대를 기부하고 매주 목요일 연주법을 가르쳤다. 동료 연주자가 된 수강생 6명과 2, 3명씩 조를 짜서 번갈아 갔다. 실망한 듯하던 아이들의 표정은 악기를 배우며 달라졌다. 강씨가 다니는 서교동 예수가족교회에서 드럼과 건반을 기증했다.

강씨는 지난 1일 룽 공연으로 첫 약속을 지켰다. 영락보린원에서 기타 교습을 시작할 때 1년 뒤 공연하게 해주겠다고 했었다. 강씨에게 룽은 시작이다. “다른 보육기관과 단체에도 악단을 만들어줄 계획이에요. 기회만 열리면 그냥 가르쳐주겠다고 나설 연주자가 많아요. 그 힘을 갖다 써야죠.”

22일 밤 룽이 클럽 리디안에서 다시 모였다. 룽의 다음 목표는 음반 제작이다.

글 강창욱 기자·사진 구성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