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수입 사치품 변화] 김정일, 현장지도 나가 ‘대중적 사치품’으로 선심
입력 2011-05-25 10:16
북한 지도층에게 사치품은 일종의 ‘공범의식’을 강화하는 매개체다. 굶주린 인민들 뒤에서 충성의 대가로 하사받는 사치품이 달콤할수록 인민과의 거리는 멀어지지만 엘리트층끼리의 결속은 단단해졌다. 메르세데스벤츠 승용차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 사인이 새겨진 롤렉스 시계까지 사치품은 그런 이유로 전달되고, 소비됐다. 사치품 규제가 포함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도, 식량난 심화에도 사치품 수요는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북한이 소비하는 사치품목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본보가 24일 유엔 무역통계 시스템(Comtrade)을 통해 대북 수출금지 사치품 목록을 조회한 결과 소수 엘리트를 위한 승용차의 수입은 줄어든 반면 화장품, 골프용품 등의 수입은 급증한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 ‘선물정치’ 구성 변했다= ‘일본 직수입 승용차, 벨기에 보석, 스위스 시계, 덴마크 캐비어….’
2005년까지 북한이 사들인 사치품이다. 각국이 내로라하는 대표품목을 골라 쇼핑했던 북한은 2006년을 기점으로 쇼핑 대상국을 대폭 줄이는 변화를 겪게 된다.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 1718호를 통해 재래식 무기 개발과 관련된 전략물자와 사치품의 대북수출 중단을 만장일치로 합의한 시점이다.
유엔 무역통계 시스템을 통해 각국의 대북 수출품 가운데 사치품 내역을 분석해 보니 2006년 이후 중국이 북한의 수입 대상국으로 급부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까지 일본과 스위스가 각각 1위를 차지했던 승용차와 시계도 2006년 이후 중국이 1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중국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다.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 마커스 놀랜드 선임연구원은 “대북 제재안이 채택된 2006년 이후 사치품 수입 규모가 오히려 늘어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사치품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선물 구성에도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2500㏄ 이상 승용차 수입 규모는 2000년 151만5888달러였으나 지난해에는 12만1676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골프·스노카와 골프용품 수입은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2004∼2006년 사이 1만∼2만 달러어치가 수입된 골프·스노카는 2009, 2010년 각각 8만 달러 이상 사들였다. 골프용품도 2000년대 초반 연평균 수입 규모가 4만 달러 안팎이었지만 지난해에만 무려 114만 달러어치가 수입되는 등 폭증세를 보였다. 화장품도 2006년 100만 달러 수준에서 지난해 495만6000달러로 5배 가까이 폭증했다.
본보 집계 결과 2006년 8540만 달러에 달했던 사치품 수입 총액은 2009년 들어 9183만 달러로 7.5% 늘었다.
◇북한 사치품 변화에 담긴 정치논리= 북한의 수입 사치 품목에 변화가 생긴 데에는 북한 국내 정세 변화가 깔려 있다. 고급 차량(2500㏄ 이상) 수입이 줄고 위스키, 화장품, 골프용품 등의 수입이 늘어난 배경에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악화 이후 세대교체와 권부 내 권력 암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연구원 최진욱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2007년 이후 비교적 값이 덜 나가는 품목이 확 늘었다는 건 충성에 대한 보상보다 김정은 후계구도에 대한 폭넓은 무마가 시급해졌다는 것”이라며 “소수에 대한 큰 선물보다 똑같은 돈이라면 여러 사람에게 많이 줄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연세대 통일연구소 이상근 연구위원도 “평양시에서 27㎞ 떨어진 태성호 주변(남포시 용강군) 평양골프장 등 북한 내 골프장은 알려진 곳만 6곳 정도”라며 “주로 고위층과 외국인(중국 관광객과 외교사절)을 고객으로 운영돼 골프용품 선물이라면 간부층을 겨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악화설이 불거진 2008년 이후 현장 시찰을 대폭 강화하고 있는 것도 비교적 ‘대중적인’ 사치품으로 구성이 변한 원인으로 꼽힌다. 건강악화 이후 국내정치 불안이 커지자 현장지도 등을 강화하면서 격려품 용도의 가죽제품이나 화장품이 대거 필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통일부가 집계한 김 위원장의 현장지도 등 대외 공개활동 건수는 2008년 97건에서 2009년 159건, 2010년 161건으로 급증했다.
◇어떻게 조사했나=사치품 분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SC) 결의 1718호(2006년)에 따라 각국이 정한 금수품목을 따랐다. UNSC 1718호에는 대북 금수품목으로 재래식 무기 외에 ‘사치품’을 별도항목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해당품목을 명시하진 않았다. 본보는 미국과 유럽연합, 호주, 일본, 싱가포르 등 주요국이 정한 금수 사치품목을 정리해 2개국 이상이 공통으로 지목한 품목을 따로 분류했다. 이렇게 작성된 품목은 모두 28종으로 해당 HS코드는 86개였다.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