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오종석] 북한판 남순강화(南巡講話)

입력 2011-05-24 17:48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이 10년을 맞은 1989년 중국에서는 천안문(天安門) 민주화운동이 발생한다. 1991년에는 소비에트연방(소련)이 붕괴된다. 그러자 중국 내부에서는 ‘싱쯔싱서(姓資姓社·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논쟁이 촉발되는 등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된다. 덩샤오핑은 87세 노구를 이끌고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 중국 남부지역을 순회한다. 순회기간 그는 지방 간부들을 만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순회를 끝낸 뒤에는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는 내용의 중요한 담화를 발표한다. 이것이 남순강화(南巡講話)다. ‘고양이가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 성향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도 이때 나온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 중이다. 당초 예상을 깨고 동북3성에서 무박3일간 3000여㎞를 질주해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 등 동남쪽으로 향했다. ‘제2의 북한판 남순강화’란 얘기까지 나온다. ‘북한판 남순강화’는 김 위원장의 2006년 1월 방중 때 처음 나왔다. 김 위원장은 당시 8박9일 동안 후베이(湖北)성 우한에서부터 광둥(廣東)성 광저우, 선전 등을 방문했다. 그는 당시 중국 개혁·개방 현장의 최일선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개혁·개방을 하니 이렇게 발전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앞서 김 위원장은 2001년 1월 방중 때 상하이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 첨단 개발구인 푸둥신구(浦東新區)를 둘러보며 “천지개벽을 했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 당국은 물론 한국도 뭔가 기대감을 갖고 있다. 북한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상상한다. 체제 안정에 급급한 나머지 폐쇄적인 경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북한이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설 수도 있다고 내다본다. 하지만 북한은 그동안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2001년 상하이를 방문한 뒤 2002년에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한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내놨지만 성과는 뚜렷하지 않았다. 2006년 1월 방중 이후에는 더 큰 기대를 가졌지만 실망스러웠고 충격적이었다. 특별한 개혁·개방 조치는 내놓지 않고 그해 7월 미사일을 발사했다. 10월엔 핵실험까지 강행했다. 오히려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외부에 도발을 시작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에도 5월과 8월 중국을 방문해 첨단 산업시설 등을 둘러봤다. 하지만 이후 특별한 개혁·개방 조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 북한은 이후 더욱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1월엔 연평도 포격 도발을 해 남북 간 경협에 찬물을 끼얹었고,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도 식량 지원까지 어렵게 만들었다.

김 위원장은 지난 여섯 차례 방중 때마다 첨단 산업시설을 시찰했다. 개혁·개방의 성과를 직접 눈으로 관찰했다. 이번 방중에서도 마찬가지다. 23일에는 양저우에서 가장 발전한 개발구를 찾아가 첨단 태양광 업체 등을 방문했다. 대형 할인마트에 들러 시장경제의 흐름도 체험했다. 24일에도 난징에서 첨단 전기·전자 기업체를 방문했다.

하지만 이번 방중 이후에도 북한이 본격적인 개혁·개방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과거처럼 도돌이표에 그칠 수 있다. 김 위원장의 행보가 중국의 경제 지원을 이끌어내고 단순한 투자 유치를 노린, 개방 의지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 당위성 확립이나 중국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의 중국 방문이라면 더욱 실망스럽다.

북한은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동안 중국의 사회주의식 시장경제를 통한 개혁·개방에 두려움을 가져 왔다. 하지만 이제는 북한 경제가 더 이상 버틸 상황도 아닌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김 위원장이 과거 여섯 차례 방중과 달리 이번에는 ‘통 큰’ 결정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번 방중이 실질적인 ‘북한판 남순강화’로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베이징=오종석 특파원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