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치료로 빠진 손톱에 골무 끼워 장편 써 “병이 준 선물”… 全作 소설 ‘낯익은…’ 펴낸 최인호
입력 2011-05-23 21:28
“이 소설은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다. 하나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주신다면 나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의 ‘제2기의 문학’에서 ‘제3기의 문학’으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다.”
장탄식처럼 들리는 이 말은 2008년 5월 침샘암 발병 이후 외부와 접촉을 끊고 요양에 들어간 최인호(66)씨가 전작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도서출판 여백미디어)를 펴내면서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일종의 각오다.
2010년 10월 27일부터 같은 해 12월 26일까지 정확히 두 달 만에 쓴 이 소설의 집필 과정은 더욱 애처롭다. “두 달 동안 나는 계속 항암치료를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손톱 한 개와 발톱 두 개가 빠졌다. 아직도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원고지에 만년필로 소설을 쓰는 수작업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빠진 오른손 가운데 손톱의 통증을 참기 위해 약방에서 고무골무를 사와 손가락에 끼우고 20매에서 30매 분량의 원고를 매일같이 작업실에 출근해서 집필하였다.”
발병 이후 3년 동안 수술도 했고 항암치료도 계속했으나 완치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는 잠행에 들어갔고 극히 가까운 지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근황을 알 길이 없었다. 2010년 새해 벽두에 그가 1975년부터 34년6개월 동안 월간 ‘샘터’에 게재해 왔던 소설 ‘가족’의 연재를 중단한다는 갑작스러운 소식도 사태의 심각성을 부추겼다. 그의 실질적인 창작 여정은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최인호의 투병은 우리 문학계로서 큰 손실이었지만 한 작가의 문학적 완성도에 있어서도 엄청난 고통과 좌절을 안겼다. 1985년 ‘잃어버린 왕국’을 시작으로 역사와 종교를 다룬 장편에 치중해 왔던 그가 자신의 본령인 현대소설과 단편으로 복귀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중에 찾아온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투병 중에도 숨고르기를 잊지 않았다. 아니 그의 병이 그를 다시 현대소설로 복귀하게 만들었다. 그는 역전의 승부사였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3년간의 백기투항이 장거리 주법의 호흡을 앗아가는 역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만약 내가 암에 걸리지 않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체질 개선을 하겠다고 몸부림쳤더라면….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나의 십자가인 원고지 위에 못 박고 스러지게 할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다.”
소설은 유실된 기억 속의 진실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3일 동안의 모험과 추적을 그리고 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시계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의 흐름을 느끼는 소설 속 주인공 K는 그런 의미에서 최인호의 분신에 다름 아니다.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는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은 주인공 K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K1과 합체되는 장면과 연결되는데 이는 암을 통해 오히려 온전한 자아를 찾아가는 작가 최인호의 눈물겨운 현실 위에 얹혀져 더 큰 감동을 선사한다.
최인호는 소설 출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의 접촉을 끊고 지방에서 피정 중에 있으며 지난해 집필 중 찍은 사진 몇 장을 출판사를 통해 배포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