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종회] 작가는 작품으로 죽음을 넘는다

입력 2011-05-23 17:33


“칠순을 넘겨 백발이 성성한 소설가 김용성은 병상에서 내게 세 가지 부탁을 했다”

봄꽃 향내가 한창 풍성하던 몇 주 전, 평소 가까이 모시던 작가 김용성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허리가 안 좋아 병원에 들어가 있었기에,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음성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애.” 그 무슨 말씀이냐고 재차 물었더니, 갑자기 암 말기 판정이라는 대답이었다. 지난해 검진에서 별 문제 없다고 하더니, 암 말기가 그렇게 느닷없단 말인가.

다시 병원을 찾아간 내게, 칠순을 넘겨 백발이 성성한 작가는 세 가지 부탁을 했다. 그분이 작가이고 내가 평론가이니 당연히 책에 관한, 그것도 조목조목의 당부였다. 그동안 많은 창작집을 내었으나 수필집을 한 번도 묶은 적이 없는데 한 권 정도 분량이 될 것이다, 여러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쓴 김용성 연구도 한 권이 될 것이다, 그리고 1984년 이후 절판된 ‘한국현대문학사탐방’의 재발간이 마지막 소원이다, 라는 가슴 아픈 설명이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모자랐다. 출판사 섭외도 간단하지 않고, 인력도 필요한데, 무엇보다도 생전에 한 권이라도 볼 수 있도록 서둘러야 했다. 그분 아픈 문제는 의논할 틈도 없이 움직여서 속히 가편집된 책을 들고 찾아뵈려는 그 전날, 부음을 들었다. 망연자실, 참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름 있는 한 작가가, 그렇게 친숙하던 한 인간이 그토록 쉽게 유명을 달리 할 수 있다니.

빈소와 영결식에서 흘리는 눈물은 산 자를 위한 것이었다. 추후 책 세 권을 완성해 추모 출간기념회를 연다고 한들 그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분을 보내고 기억하는 자의 빈 터에 선 내게 두 가닥의 절실한 깨우침이 남았다. 하나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이었다. 대학과 문단의 선배로서, 함께 가꾸던 양평 소나기마을의 촌장으로서, 그만한 명성과 인품과 기량을 가진 분이 드물어서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를 견뎌야 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역시 고색창연한 옛말이었다. ‘잃은 자와 찾은 자’, ‘리빠똥 장군’, ‘도둑일기’, ‘기억의 가면’ 등은 그분이 이 세상에 남긴 빛나는 문학적 업적의 이름들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작품으로 사후의 세계를 산다. 걸출한 소설들이 문학사의 징검다리로 살아 있는 한, 작가 또한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종교가 그 의미를 갖는다는 측면에서, 작가에게 작품은 하나의 작은 종교에 해당한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이 육당 최남선의 집 앞에서 친일의 길로 가버린 벗의 죽음을 통곡했는데, 육당은 집 안에서 그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이 아니라는, 기막힌 힐난이었다. 작가 이병주는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라는 소설에서, 뜻 있는 테러는 살생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죽이는 살사(殺死)라고 피력했다. 두 경우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올곧은 정신의 유무에서 찾았다. 작가로서 이 경계를 뛰어 넘는 비결은 오직 다음 세대에도 그 평가가 이어질 작품을 남겼느냐에 있다.

김용성의 ‘도둑일기’는 성장소설의 사회학을 보여준 보기 드문 수작이다. 어린 시절에 전란의 한 가운데 던져진 세 형제가 사업가·소설가·성직자로 성장하는 동안,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유언과 도둑질을 해야 연명할 수 있는 현실 사이의 어지러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이야기이다. 형과 동생이 사업가와 성직자로 구분되고 가운데가 기록자인 소설가로 설정된 것은 매우 산뜻한 서사구조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을 위해 도둑질을 계속하는 한국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이 소설이 설득력과 효용성을 갖는 지점에, 작가 김용성은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양가적 방식으로 면면히 살아있다. 중국의 방랑시인 두보가 ‘관을 덮고서 일이 정해진다’라고 시의 한 구절로 쓴 것은 이와 같은 생전의 성과가 사후의 명성을 결정한다는 말의 함축이다. 김용성 작가의 스승 황순원 선생도 평상시에 늘,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라고 강조하곤 했다. 죽어도 살 수 있는 길, 그 길이 기실 우리 모두에게도 공평하게 열려 있다.

김종회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