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5-22 17:25


(46) 거룩한 음모

마가복음의 흐름으로 예수의 길을 따라가면서 끝으로 갈수록 더 분명해지는 게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평범하지 않다’는 표현으론 예수 죽음의 깊은 뜻을 절대로 드러낼 수 없다. 뭐랄까, 추리소설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소설이 끝나기 직전에 다시 한 번 반전하면서 독자의 심장을 쥐었다 놨다 하더니 소설이 끝난 뒤 사족처럼 붙어 있는 에필로그에서 또 한 번 반전하는 식이랄까…. 신학자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 역사의 비밀을 푸는 축과 같은 거야.’

체포에서 심문을 거쳐 사형선고를 받는 전 과정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몇 마디 하신 말은 사실상 자신을 불리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유대 법정과 로마 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된 결정적 단서는 예수님이 스스로 말씀하셨다. 유대 법정에서는 자신이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라 하여 신성모독죄가 성립되었고, 로마 법정에서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 하여 반역죄가 성립되었다. 예수 자신이 입만 열지 않았다면 사형선고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왜?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는 게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하신 모든 말씀이 일곱인데 그걸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복음서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오는 내용 모두를 모은 것이다. 각 복음서가 나름대로 고백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가 내려오면서 종교 생활의 필요에 따라 모아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각 복음서의 흐름을 따라 그 복음서의 고백을 추적해 가면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이 훨씬 더 생생하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딱 한 말씀만 하신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욕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조롱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희롱했지만 예수님은 그들과는 한마디도 말을 섞지 않으신다. 그들에겐 관심도 없으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오직 한 분을 대면하고 계시다.

하늘 아버지! 십자가 위에서 하신 한마디가 바로 그분에게 던지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절규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 이 표현의 시제가 과거다. 예수님이 절규하는 시점보다 조금 전에 하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버리신다. 실제로!

예수의 죽음에서 이것이 핵심이다. 하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알고 계셨다. 어찌 보면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빌라도나 이스라엘 군중 등 모든 사람은 조연이고 엑스트라일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아들이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연출자면서 동시에 고난을 받고 죽는 자리에 선다. 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극소수만 알고 있으니 이 일을 ‘음모’라 부를 수 있다. 음모가 부정적인 모략을 뜻하니까, 이걸 뒤집으려 앞에 ‘거룩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면 좋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거룩한 음모’가 된다. 역설이다. 음모가 거룩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비한 죽음을 조금이나마 표현할 수 있다. 창조주 아버지와 아들 그리스도가 펼치신 인류 구원의 거룩한 음모 말이다.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