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에서 교회 갈 길을 묻다… 감리교 목회자 연구모임 ‘아레오바고’ 동작동 묘역 순례

입력 2011-05-20 17:49


길을 잃었을 때는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게 순리다. 처음 출발지부터 더듬어오다 보면 어디서부터 그릇 왔는지 비로소 길이 보이게 된다. 길 잃은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도 처음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야 어긋난 길에서 돌이켜 제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19일 오후 10여명의 목회자들이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감리교 선교정책연구공간 ‘아레오바고’ 회원들이 호국의 달을 앞두고 신앙 선배들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다. 기독교 사학자인 조이제(샘솟는교회) 목사가 앞장섰다.

129만㎡(43만평) 넓이의 서울현충원엔 17만기의 묘가 있다. 그중 크리스천 애국지사의 묘비를 찾는다는 것은 산속에서 보물을 찾겠다는 거나 한가지였다. 다행히 국내 기독교 유적 답사의 베테랑 조 목사의 안내로 쉽게 임시정부 지사의 묘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 사랑이 나라 사랑이요 이웃 사랑이 민족 사랑이다.’ 비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정도 목사. 평안도 출신인 그는 과거를 보러 가다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상투를 잘랐다. 집에서 쫓겨난 그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돼 ‘손정도식 부흥운동’이라 일컫는 사회적 실천운동을 주도했다.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있다가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장(국회의장)이 됐다. 임시정부 내 파벌이 생기자 만주로 넘어가 이상촌 건설에 모든 걸 바쳤다. 실패하고 지린(吉林)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당시 빨치산 운동을 하던 김일성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추앙했다.

조금 내려가 보니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사한 주기철 목사의 묘비가 나왔다. “주 목사님의 묘가 여기에 있었나요?”란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조 목사는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양화진선교묘원에 묻힌 해외 선교사들은 기억하지만 국내 크리스천 애국지사들이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은 아예 모르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신석구, 이필주 목사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둘 다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감리교 목사다. 이 목사는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군사훈련을 시키다 전덕기 목사한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됐다. 상동교회 청년학원은 당시 민족 지도자를 길러내는 산실이었다. 일제 기록에 의하면 상동교회 청년학원에만 2000∼3000명이 모일 정도였다. 특히 민중에 다가간 전덕기 목사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당시 애국지사라면 예외 없이 전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조 목사의 전언이다.

이렇듯 교회나 민족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전 목사지만 그의 묘비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독립지사 묘역 한켠에 위치한 무후선열제단. 유해도 후손도 찾지 못한(無後) 210명의 애국지사들을 기린 곳이다. 일제의 박해가 심해지자 전 목사의 후손들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연락이 완전 두절됐다. 금호동에 묻었던 전 목사의 유해는 그 일대가 개발되면서 화장해 강물에 뿌려 흔적도 없게 됐다. 이 무후선열제단엔 전 목사뿐만 아니라 김규식, 유관순, 이상설, 이동휘, 김마리아 등 쟁쟁한 크리스천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마치 무명용사처럼 조그만 위패에 적혀 있을 따름이다. 이 날 방문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무명용사들의 제단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병일(철원 향원감리교회) 목사는 “이름 없는 용사들이 결국 나라를 구한 것 아니냐”며 “무명용사처럼 사는 게 진정한 목사의 길인데 자꾸 자신의 이름을 내려니까 분쟁이 생긴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무후선열제단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