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킨슬러 선교사 “남북한 장애아동, 장애있는 내 딸 같이 품어요”

입력 2011-05-20 16:59


[미션라이프] “북한 고아와 장애인을 돕는 일은 우리 민족의 복지문제고 건강한 민족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이 된 이후에 하면 늦어요. 지금 해야 합니다.”

39년 동안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남북한 고아와 장애인을 품어온 신영순(수 킨슬러)선교사는 20일 서울 연희동 서울외국인학교 내 있는 자택에서 북한을 돕는 것은 ‘퍼주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고아와 장애인을 돕는 대북지원사업을 불씨에 비유했다. “사람들이 북한에 교육기자재, 체육용품 등을 보내주면 ‘왜 그런 사치품을 보내냐’ 해요. 그러면 저는 통일은 복지의 기초를 다지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말해요. 때가 되면 불씨가 타오를 수 있게 준비하는 거라고요.”

처음부터 그가 북한 고아와 장애인 지원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원래는 1972년부터 한국에 있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했어요. 그러다 1977년에 낳은 딸이 뇌막염으로 정신지체 장애아가 되었지요. 딸을 통해 장애인의 삶을 깊숙이 바라보고 이해하게 돼 시작하게 됐지요” 그에게 이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장애아동인 딸을 돌보면서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기에 딸과 선교지 중 하나를 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딸은 미국에 보내고 그는 선교지에 남았다. “선교사인 남편(아서 킨슬러)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딸을 한 알의 밀알로 삼자고 했어요.”

신 선교사는 딸 이야기를 하면서 자주 눈시울을 붉혔다. “하나님이 저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사용하신 것 같아요. 딸을 통해서 남북한의 고아와 장애인들을 엄마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었거든요.” 그는 7년간 서울 번동서 장애인 복지관을 운영하다 동료 선교사를 통해 북한의 실상을 듣고 북한선교에 뜻을 정하게 되었다.

1998년 5월 결핵약을 들고 찾아간 것을 시작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북한 고아와 장애인 사역을 시작했다. 2003년부터 황해북도 사리원과 평양에 콩우유와 빵공장을 세워 아이들의 영양보충에 힘썼고 조선장애자보호연맹과 만나 2007년 통일부 기금으로 장애인복지관을 설립했다. 이외에도 유럽연맹 핸디캡 인터내셔널과 함께 장애인용 자전거와 휠체어를 보급했고 최근엔 북한 아이들을 1대1로 후원할 수 있는 푸른나무 뉴코리아문화복지공동체를 세우는데 큰 힘을 보탰다.

올해 8월에 미국장로교 선교사를 은퇴하는 그는 “이제 초교파적으로 더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아직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재 상태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갈 순 없어요. 십여년간 쌓은 신뢰와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와 남한 후원자와 북한 장애인을 연결하는 일 계속해야죠.”

그는 한국교회가 ‘요셉의 마음’을 가지고 북한선교에 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형들이 흉년이 들어 식량 구하러 왔을 때 요셉은 형들의 사과 먼저 구하지 않았어요. 식량 먼저 주고 가족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지혜를 발휘했죠. 배은망덕하다고 원망하기 보단 먼저 우리 형제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통일을 위해 멋진 결단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양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