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에 빠진 그녀 노예처럼 사느냐 도망이냐… 중국 리얼리즘의 걸작 ‘블라인드 마운틴’

입력 2011-05-20 17:26


외딴 곳에 갇혔다고 상상해보자. 그곳 주민들은 무지몽매하다. 지역 관리조차 법과 상식이 통하기는커녕 내 말조차 듣지 않는다. 바깥으로 통하는 길은 오직 하나.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 도망치다 붙잡히면 혹독한 매타작을 당해야 한다. 자, 운명으로 여기고 순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칠 것인가.

영화 ‘블라인드 마운틴(盲山)’는 인신매매범에 의해 산촌으로 팔려간 여인이 자유를 위해 벌이는 사투를 사실적으로 그린다.

22살 여대생 바이 수에메이(황루)는 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 깊은 산 속 마을을 돌아다니며 허브 약재를 사다 되파는 일에 나선다. 돈을 많이 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간 그녀는 중국 북부의 한 산촌에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정신을 잃는다. 잠에서 깬 바이는 인신매매범에 의해 7000위안에 40살 후앙 데구이의 가족에게 팔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이는 마을을 떠나려고 하지만 후앙과 그의 가족이 돈을 되돌려달라며 그녀를 감금한다. 마을주민은 물론 경찰과 관공서 직원들도 관습이라며 후앙 가족의 편에 선다. 바이는 결국 후앙과 강제로 혼인을 하게 되고 겁탈을 당한다. 바이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추적에 번번이 실패하고 갖은 핍박을 당한다.

2007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았던 작품이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만큼 자본주의 도입에 따른 중국의 일그러진 단면을 잘 보여준다. 겉으론 평화롭고 고요한 마을이지만 평범한 여성의 삶을 짓밟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듯, 중국의 번영 뒤에 숨은 잔혹성을 고발한다. 자살을 시도한 바이를 본 의사가 돈을 먼저 내놓지 않으면 환자를 돌보지 않겠다고 하는 장면이나 바이가 도주 도중 시내까지 데려다 달라고 애걸하는데도 돈을 주지 않는다고 운전사가 태워주지 않는 장면 등에서는 금권주의에 찌들어 동정심 같은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등장인물 중 직업 배우는 황루 등 고작 3명이고 나머지는 촬영장 인근 주민들인데 아마추어들의 연기력이 프로 뺨친다. 잔혹한 이야기이지만 화면 자체는 폭력적이지 않다. 남편 매질도 행동만 요란하다. 피 튀고 험한 말이 난무하는 요즘 영화에 비할 게 못된다.

영화는 2003년 ‘눈먼 광산(盲井)’으로 데뷔한 리양 감독의 ‘맹(盲)’시리즈 2탄이다. 특히 번개처럼 절묘한 절정으로 숨 가쁘게 치닫는 마지막 1분은 칸을 찾은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으며 ‘2007년 칸영화제 최고의 라스트 신’으로 기억됐을 만큼 명장면이다. 투박하지만 묵직한 중국 영화의 힘이 느껴진다. 아! 그녀, 어떻게 됐을까? 15세 이상, 5월말 개봉.

김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