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의 人 + 文] 인문학, 무엇을 가르치나

입력 2011-05-19 18:14


근년 들어 인문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의 용도’에 관한 질문들이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가장 자주 제기되곤 하던 질문은 인문학이 밥벌이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라는 것이다. 요즘은 이 종류의 질문을 대놓고 입에 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식꾼’ 소리를 들을까봐 말조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뱉어 내지는 않는다 해도 인문학이나 인문학 교육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그런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꾹꾹 눌러 참는 눈치가 역연하다. K대학이 최근 새로운 교양교육 프로그램으로 출범시킨 ‘후마니타스 칼리지’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이른바 ‘어느 대학의 역주행’이라는 것에 대부분 초점을 두고 있다. “다들 실용 위주로 가는데 어째서 당신네 대학은 인문학을 들고 나와 거꾸로 가려는 것이냐?” 기자들이 뭘 몰라서 그렇게 묻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독자들이, 그 ‘거꾸로’ 부분을 가장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려는 거다.”

실제로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교양교육 프로그램은 인문학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실용을 배제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도 언론이 그 대학의 새로운 교육설계를 자꾸 ‘실용 대 인문학’의 대립구도로 몰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마치 이 시대의 거역할 수 없는 질서인 양 ‘인문학=비실용’이라는 생각에 깊이 매몰되어 온 탓일 것이다.

인문학 특히 인문학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의 용도가 뭐냐?”라든가 “인문학 해서 밥 먹고 살 수 있나?” 같은, 이른바 ‘인문학의 비실용’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들에 명쾌한 응답을 내놓아야 한다. “인문학의 정수는 실용을 넘어선 곳에 있다”라거나 ‘인문학의 위대한 비실용’이라는 식의 답변으로 만족할 때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응답에는 깊은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은 당장 사람들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기에는 상당히 먼발치에 있어 보인다. 우선 인문학 종사자들은 실용성을 따지는 것이 비인문학적 태도가 아니라 인문학 전통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의 조상 세대에 속하는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시인의 용도’를 따진 일을 기억해 보라. “국가에 시인이 있어야 하는가? 그의 용도가 무엇이냐?” 시인이 전쟁을 지휘할 줄 아는가, 토목공사에 도움이 되는가, 배를 만들 줄 아는가? 그가 할 줄 아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철학의 실용성 혹은 실천 가능성을 끊임없이 질문하고 강조했던 사람이다. 철학이 왜 필요한가? 그것의 실용은 무엇인가? 이론(에피스테메)과 실천(테크네)은 왜 반드시 결합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요즘 말로 하면 인문학의 실용성에 대한 가차 없는 따짐에서 나온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지금도 문학-문학이론에 관한 아주 강력한 텍스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쓴 이유의 하나는 스승 플라톤이 ‘시인의 용도’를 따진 것에 응답하기 위해서다. 시인(요즘 말로는 ‘작가’를 총칭)은 무엇 하는 사람인가? 그는 무엇을 ‘만드는(poieia)’ 사람이다. 무엇을 만드는 사람? ‘플롯을 만드는 사람(plot-maker)’이다. 도예공이 질그릇을 만들고 대장장이가 호미를 만들 듯 시인은 플롯을 만든다. 모든 플롯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이며 계획의 완성을 향한 운동이다. 도토리에게도 그런 플롯이 있다. 도토리의 플롯은 도토리나무가 되자는 것이다. 시인(비극작가)이 만드는 플롯은 그가 다루는 사건이 필연성의 논리에 따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결말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필연성의 전개를 보여주는 시(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비극’)는 그래서 우연성의 개입을 차단하기 어려운 역사보다도 훨씬 더 철학적이다. 필연적 질서가 우연의 난동을 어떻게 통제하고 제압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플롯메이커로서의 시인의 하는 일이다.

지금의 복잡다단해진 문학이론의 판도에서 보면 <시학>의 플롯이론은 그 위상을 상당히 삭감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적 실천의 차원에서 말하면 무엇을 ‘만드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그의 관점은 그가 강조했던 잠재력의 실현(unfolding)이나 어떤 목적을 향한 ‘비커밍’(becoming, ‘되어가는’)의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견해와 함께 지금도 그 유용성이 아주 크다. 인간은 여전히 무엇을 만드는 자이며, 자기의 내적 잠재성을 발현시키고자 하는 존재이고 어떤 목적을 향해 자기를 형성해가는 존재이다.

인문학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 실용성 혹은 실천적 용도는 무엇인가? 대학 교양교육이 대학에 갓 들어온 19살짜리 청소년들에게 우선 들려주어야 하는 것은 ‘인문학의 근본적 세 가지 건축기술’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이다. 그 기술은 이런 것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



-나는 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



-나는 남과의 관계를 어떻게 건축할 것인가?

인문학도들은 여기 ‘기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한 두드러기를 좀 잠재우고 이 건축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잠시 기다렸다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다음 칼럼 때까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