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12) 한국 찾는 선교사 줄이어
입력 2011-05-19 17:44
알렌이 오고… 美 교회 한국과 통하다
개항과 함께 쇄국의 녹슨 빗장이 열리게 되자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된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형성은 한국인의 구도적 기독교 영입운동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1884년 알렌의 입국에서부터 1945년까지 내한한 1470명의 선교사들 중 미국 국적의 선교사가 65%에 달했다. 미국교회가 한국 선교를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은 천주교회만이 아니라 개신교회도 이미 전파되어 있었으나 한국 선교를 주도한 나라는 인접한 나라가 아니라 미국교회였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게 되자 최초로 한인교회가 형성되었고, 또 조선인 박영선 이경필 등 개종자가 늘어나게 되자 일본교회 내에서 조선을 전도하자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또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나 이수정은 일본인의 조선 선교를 반대하였고, 중국인의 조선 선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도리어 그는 지리적 격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이 조선을 선교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그것이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구 문명을 접하기보다는 미국인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접하게 해야 한다는 희망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판단은 적실(適實)했다. 이후의 한·일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만일 일본인에 의해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되었다면 오늘과 같은 교회의 부흥이나 성장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조선 선교를 했다면
이수정의 한국 선교를 위한 호소가 감리교 선교잡지에 소개되면서 미국 감리교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 감리교회 고우처(John F Goucher)의 조선인 견미사절단 일행과의 만남, 그리고 감리교 해외선교부의 파울러(Bishop C H Fowler) 감독의 조선 선교를 위한 2000달러 희사는 미국 감리교회의 조선 선교 동기가 된다. 고우처는 일본에서 감리교회를 개척한 매클레이(Robert S Maclay)에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했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2주간 조선을 방문하고,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 활동을 통한 선교사업을 허락받기까지 했다. 매클레이는 “이런 윤허는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감격적으로 인식했을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진전에 부응하여 감리교 선교부는 의료선교사 파송을 준비하고 1884년 10월 스크랜턴(Dr William B Scranton)과 그의 어머니 메리를 조선에 파송할 선교사로 임명하고, 곧 아펜젤러도 한국 선교사 후보로 받아들였다.
미국 장로교회 또한 이수정과 일본 및 중국 주재 선교사들의 호소, 특히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인 맥윌리엄스(David W McWilliams)가 조선 선교를 위해 1884년 5월 1일 5000달러를 희사한 일은 미 북장로교회의 한국 선교 동기가 된다. 5000달러는 두 선교사가 조선에서 1년간 일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제 한국 선교사를 물색할 단계에 이르렀다.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의사 해론(Dr John W Heron)을 조선에 파송할 첫 선교사로 임명했다.
첫 한국 거주 선교사 알렌
이처럼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선교사 파송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내한한 첫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의 알렌이었다. 북장로교회 해론의 내한이 지체되고 있을 때 이미 중국에 와 있던 알렌이 내한함으로써 그는 한국에 거주하게 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가 된 것이다. 미 북장로교의 알렌(Dr. Horace Newton Allen·安連·1858∼1932)은 미국의 첫 중국 의료선교사로서 광저우병원을 설립, 일하고 있던 피터 파커(Dr Peter Parker·1804∼1888)의 영향을 받았다. 1883년 10월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그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선교지가 된 한국으로 가서 일하도록 권유받고 1884년 9월 14일 상하이를 떠나 부산을 거쳐 9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 공적으로 입국한 최초의 거주선교사였다. 그는 미국공사 푸트에 의해 공사관의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중국에 남겨두었던 가족을 서울로 데려왔고, 외국 거류민을 위한 의사로 일하면서 한글을 익히는 등 은밀하게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갖추어 갔다.
알렌은 1884년 12월 4일 발생한 갑신정변 때 자객의 칼에 찔려 혈관이 끊기는 부상을 입은 우영사 민영익(1860∼1914)을 치료해 준 일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고, 1885년 3월 27일에는 국왕과 왕비를 진료하기 위해 처음으로 입궐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그는 곧 고종의 어의로 임명되었고, 미국의 대리 공사 폴크(George C Foulk)를 통해 조선 정부에 서양식 병원 건립을 제의하였다. 이 제안에 따라 1885년 2월 25일 고종으로부터 병원 설립의 허락을 받고, 4월 10일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하게 되었는데,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곧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되었고, 후일에는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알렌의 어학 선생이었던 노춘경은 1886년 7월 11일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국내에서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