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5-19 17:42


중세의 교회와 국가

교회사의 최대의 역설은 교황청이다. 그리스도에 의해 최고의 권위를 상속받은 베드로의 계승자는 로마교황이라고 강조한다.

6세기까지만 해도 교황이란 용어는 ‘아버지적 돌봄’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지중해 문명이 파괴되기 시작하고 교회가 파멸의 위기를 겪는 암흑시대로 접어드는 7세기 이후 교황청 역사가 시작되었다.

AD 800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왕관을 쓰면서 프랑크왕국의 대제가 된 찰스 대제는 어거스틴의 ‘신국’을 읽으면서 중세 천주교회와 교황의 힘을 이용해 세계를 제패하는 파시즘의 꿈을 꾸었다. 1077년에 카노사 성에서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를 눈 내리는 겨울에 굴복시킨 교황 그레고리 7세도 매일 어거스틴의 신국을 읽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속권력 위에 지배하려는 망상을 가졌다. 독일 왕 하인리히 4세와 독일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논쟁하던 끝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키자 하인리히 4세가 눈 내리는 겨울밤, 3일을 참회함으로써 파문을 취소시켰다.

인노센트 3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서 교황청의 권위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을 반신적 존재로 여기고 교황은 태양이요 황제는 달이라고 해석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영혼의 사제로서 육신의 사제인 황제의 복종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14세기 아비뇽 교황들은 13세기 교황들과는 다른 위치에서 교황직을 수행했다. 1305년 프랑스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교황이 된 프랑스 대주교 보르도(추기경이 아님)가 프랑스를 떠나기 싫어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을 만들면서 시작됐다. 아비뇽 기간 동안 프랑스 추기경이 전체 추기경의 82%나 차지했다. 이탈리아 추기경이 12%, 그 외의 다른 나라 추기경은 5%를 차지했다. 첫 아비뇽 교황 클레멘트 5세(보르도)는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프랑스의 정치적 간섭을 느끼는 노예상태의 두려움을 가졌다. 추기경이 아닌 보르도의 대주교가 교황이 되었다.

아비뇽의 포로상태에 불만을 가진 이탈리아 성직자들에 의해 높은 도덕성과 개혁의 열정과 실제적 경험을 인정받아, 울반 6세가 1378년 로마 교황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교회는 아비뇽과 로마의 두 교황청으로 대분열의 시기를 맞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사회의(1409)에서 새 교황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였는데, 로마와 아비뇽이 받아들이지 않자 3명의 교황들이 상존하기도 하였다. 세속 권력을 쥔 왕들과 제후들은 로마교황 편에 설 것인가, 아비뇽교황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였다.

콘스탄스회의에서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의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틴 5세는 각 국가 최고의 통치자들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틴 5세의 후계 교황들이 종교개혁 때까지 개별적 정치관계를 유지하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소집된 콘스탄스회의는 새 교황 마르틴 5세를 1417년 선출함으로써 계속 한 명의 교황이 로마에서 다스리게 되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1305∼1417) 기간이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교회회의가 교황의 권위보다 더 높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국가들의 민족주의 의식이 자라는 상황에서 민족 교회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민족교회들은 세속 통치자들과 교황청 사이에서 종교적 문제와 재산에 의해 경쟁관계를 갖게 되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