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 ‘최후의 항일조직’ 근거지 가보니… 조선의용군 유적지엔 쓰레기에 파묻힌 비석만

입력 2011-05-18 22:21


“아∼, 이곳이 중국 내 한인들의 마지막 항일투쟁 현장이라니….”

지난 16일 중국 옌안(延安) 근교 뤄자핑(羅家坪)의 한 비석 앞에서는 한국작가단(단장 홍정선 인하대 교수)의 장탄식이 새어나왔다.

까만 화강암 비석은 황사에 뒤덮여 제 색깔을 잃은 것은 물론 비석 표면에 붙여놓았다가 떼어낸 종이 자국과 분필로 마구 휘갈긴 낙서로 더럽혀져 있었다.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구지(舊址·옛터)’라고 적혀 있었다. 1945년 조선독립동맹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군이 세운 항일군정학교가 있던 자리다.

소설가 김주영을 비롯, 박찬순 구효서 박상우 이현수 은희경 서하진 성석제씨와 시인 황동규 김형영 이시영 김기택 정끝별 장석남 이병률씨, 평론가 김치수 오생근씨 등 2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작가단은 오래도록 비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석 앞에는 종이 박스와 폐지, 쓰다 버린 목재 등 쓰레기가 사람 키 높이로 쌓여 가까이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국통인 홍정선 교수가 비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읽어내려 갔다.

“조선군정학교는 1942년 8월 화북 태항산에서 성립하였다. 1944년 1월 학교는 태항산을 떠나 3개월 행군 끝에 4월 7일 연안에 도착한 후 천구촌에 머물렀다가 같은 해 8월 학교 부지에 교사를 신축해 12월 10일 낙성했다. (중략) 주덕(朱德) 임백거(林伯渠) 오옥장(吳玉章) 서덕립(徐德立)이 개막식에 참석해 축하했다. (중략) 이 유적지에는 돌요동(동굴 가옥) 4개, 토굴 다수가 남아 있다. 연안지구 문물관기위원회 1996년 7월 1일”

주덕 임백거 오옥장 서덕립 등은 중공오노(中共五老)의 일원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건국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그만큼 뤄자핑은 한·중 항일 혁명세력의 연대를 상징하는 곳이다.

홍 교수는 “뤄자핑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 대표되는 ‘연안파’의 근거지로 유명한 곳이지만 북한은 58년 ‘연안파’ 숙청 이후 조선의용군에 대한 연구를 중지시켰다”며 “남과 북이 외면하는 사이에 조선의용군의 항일 유적지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10여년 전, 일제 치하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복권이 이루어진 후 한국정부도 이 부근에 한글로 된 유적지 표석이 세웠으나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의용군이 머물던 토굴로 이어지고 그 입구에 한글 표석이 옮겨져 있다고 했으나 이미 산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선 상태여서 작가단은 도중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주영씨는 “토굴들은 한글학자이자 북한에서 노동당위원장을 지낸 김두봉 등이 머물던 숙소인데 이 역시 폐허로 남아있는 상태”라며 “한국의 독립운동 유관 단체에서 정밀한 현지답사를 통해 한글 표석의 훼손 여부를 확인하고 복원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뤄자핑 산 중턱에는 조선의용군이 거처로 사용한 토굴 8∼9개가 남아 있는 상태지만 토굴 입구에 마을 주민들이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유적지로서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워 보였다. 김치수씨는 “‘항일’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선열들의 유적지가 방치돼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며 “한글 안내문 설치 등에 대해 정부 차원의 지원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옌안=글·사진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