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합 고백땐 ‘배신자’ 그대로 가면 과징금 폭탄… ‘죄수의 딜레마’ 빠진 정유업계 선택은?
입력 2011-05-18 21:43
정유업계가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를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공정위는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의 원적지 관리 행위를 담합으로 결론짓고 조만간 과징금을 부과할 방침이다. 일각에선 과징금 규모가 1조원을 웃돌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원적지 관리는 정유사들이 브랜드를 바꾸는 주유소에 불이익을 주거나, 이탈을 막기 위해 주유소에 혜택을 주는 관행을 말한다.
이런 가운데 정유업계의 ‘죄수의 딜레마’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자진신고하면 과징금을 감면받는 리니언시(Leniency·자진신고자 감면제) 때문이다. 담합 상대를 믿고 신고를 안했다가 자신만 거액의 과징금을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공정위가 지난 1월 조사에 착수해 비교적 신속하게 담합 결론을 내린 것도 리니언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GS칼텍스를 지목하고 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18일 “GS칼텍스가 먼저 자진신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자기만 살아남겠다고 동종 업계를 팔아넘긴 셈”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GS칼텍스는 이미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자진신고하는 게 최선이란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LPG 담합 사건으로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기억 때문이다. 당시 SK에너지와 SK가스는 공정위에 담합 사실을 자진신고해 과징금이 각각 100% 면제, 50% 감면됐다. 자진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SK가스는 1987억원, SK에너지 1602억원을 냈어야 했다. 나머지 LPG 6개사 가운데 E1은 1894억원, GS칼텍스 558억원, S-Oil 385억원, 현대오일뱅크 263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따라서 SK의 리니언시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GS칼텍스가 이번에는 보복성 선수를 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공정위는 과징금 부과에 앞서 2008년 4월 기준으로 정유사들이 자영주유소 8721곳 가운데 7363곳(84.4%)과 특정 정유사 제품만 공급받도록 하는 배타조건부 거래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발표한 ‘석유산업 경쟁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SK는 자영주유소 3001개 가운데 2805개와 배타적 공급계약을 체결(93.5%)했고, GS칼텍스 95.7%(2350개 중 2248개), 현대 100%(1816개 중 1816개), S-OIL 31.8%(1554개 중 494개) 등이었다.
정유사들은 주유소에 자사 상표표시 허용, 보너스 시스템 및 제휴카드 서비스, 각종 시설 지원 등을 조건으로 자사 제품만 구매하도록 강제하고, 전량공급 조건을 위반하면 계약해지, 손해배상 청구, 보너스 시스템 철거 조치 등의 불이익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Key Word - 죄수의 딜레마
두 공범자가 서로 묵비권을 행사해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최선이지만, ‘자백을 하면 감형해주고 자백하지 않는 쪽은 중형에 처한다’는 수사관의 유혹에 죄수들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고 결국 상대를 믿지 못해 자백하려 한다는 이론이다.
노석철 기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