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아이 넷 어릴때 보냈어… 독하고 모질어서 명이 긴가 봐”
입력 2011-05-18 18:02
강원 원주시 흥업면 성순남 할머니
망각. 그에게는 축복이었다. 많은 형제와 자녀가 먼저 죽었는데도 꿋꿋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망각이라는 지우개 덕분이었다. 올해 91세 된 성순남(강원도 원주 흥업교회) 명예권사는 경북 안동에서 2남5녀의 가난한 집 둘째로 태어났다. 딸이란 이유로 할머니의 모진 구박 속에 자랐다.
아버지가 술김에 15세 어린 딸을 시집보냈다. 이후 4남3녀를 낳았으나 3명만 남았다. 남편은 환갑 되던 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상하게 아이를 낳기만 하면 금세 죽데요. 나는 독하고 모질어서 명이 긴가봐요.” 이후 농사꾼이 싫다는 큰아들을 따라 원주에서 반평생을 살았다. 6년 전에는 41년간 살아온 집이 전소돼 사진 한장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제 하나님 품안으로 갈 날까지 깨끗한 몸과 건강을 주시길 기도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둘째 딸로 태어나 모진 구박 받다
우리 어머니가 딸을 다섯 낳았어요. 큰어머니는 아들만 낳고. 근데 우리 아버지가 팔도건달로 농사지을 것 다 짓고 가을철만 되면 나가시는 거예요. 나는 둘째 딸인데 하필 나를 아버지 나가시던 날 낳았어요.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와서 봤는데 우리 어머니 날 낳고 태도 안 자르고 뭉쳐서 옷장 농 구석에 처박았대요. 10월 달인데 돼지죽인지 소죽인지도 모르게 호박국을 끓여 놓고 밥은 양푼 하나 해놓고 할머니가 가셨어요. 다음날 안동 구담장터에서 동네 여자들이 아버지를 보고 어여 들어가 보라고 하더래요. 어머니는 눈이 허연 게 아버지가 와도 모르고 누워있고 나는 윗목에서 킥킥거리고 있더래요. 죽지 않고 사니까 제가 이렇게 명이 길어요. 어려서부터 풍상 다 겪고.
할머니는 큰아버지와 같이 살았어요. 근데 큰어머니가 할머니를 뒷방 구석에 처박아 놓고 밥도 안 줬어요. 아버지가 가니까 조카며느리가 “아이고 작은아버님 웬만하면 할머니 좀 모시고 가세요. 어머니한테 볶여 돌아가겠어요.” 그러더래요. 그래도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어머니 나 따라가자 하고 데리고 오니까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하더라니까.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가 두 살 위 언니는 업고 나는 걸려 다녔어요. 언니 머리 깽기고감기고 난 물에 나를 깽겼어요. 내가 얼마나 미우면, 똑같은 손준데. 그것도 딸이고 나도 딸인데. 헹군 물에 나를 또 헹궜어요.
나 낳고는 아수아우가 없네. 할머니가 지지배만 내지르더니 안 날능가보다 하면서 우리 어머니를 만날 야단을 켜요쳐요. 억지로 해요? 생겨야지. 근데 태기가 있어 낳는데 남동상이에요. 동상이랑 네 살 차이예요. 근데 애 백날인데 우리 할머니가 시루에다 백설기를 한 시루를 해요. 오는 사람마다 이만큼 뭉탱이로 주는 거예요. 나는 아이구 왜 떡을 해서 남을 저렇게 주나했는데. “이거 우리 손자 백떡이에요. 백떡 백떡.” 이 사람 한 덩어리 저 사람 한 덩어리.
여덟 살 먹었을 때는 그전에 여자애들 총장총채머리 땄잖아요. 할머니기 머리를 빗기다가 얼그미 빗으로 콱 쥐어박았어요. 그러니 얼굴에 피가 범벅이 됐어요. 시방 여기 이렇게 흉터가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들어오다 보고 빗기기 싫으면 그냥 놔두지 한마디 했다가 어머니 머리끄뎅이 붙잡고 제 머리끄뎅이 붙잡고 그랬어요. 할머니가 천하에 못됐어요.
여덟 살 때 집을 하나 얻어 놓고 충주로 이사 왔어요. 아버지 어머니 언니 남동생 다섯을 데리고. 원래 내가 셋째 딸인데 큰언니 죽고 둘째 딸이 살아서 내가 둘째가 됐어요. 2남5녀였어요. 나중에는 다 죽고 막내 여동생하고 나만 남았어요. 그 동생이 지금 73살 돼서 여전히 충주 인쇄소에서 잘 살아요.
근데 이상하게도 애들이 기어댕길 만하면 죽고 죽고 했어요. 저는 아들 넷 낳고 딸 셋 낳았는데 다 죽고 아들 셋만 남았어요. 제가 복이 이렇게 없다니까요. 명복만 타고. 동기간 다 죽고 어머니 아버지 환갑도 못 지내고 다 죽고. 어머니는 막내 낳고 죽었어요.
우리 집은 일제시대 때고 6·25고 별로 어려움이 없었어요. 충주에 살 때 농사를 지어서 배를 곯아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지지배로 태어나서 할머니한테 설움받느라고 그렇게 컸지.
병원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핵교도 못 가봤어요. 남동상은 야학교에 갔어요. 책을 보면 할머니가 지지배년이 뭘 들여다보느냐고 막 때려서 ‘가’자도 모르고 시집갔더랬어요.
저는 그래서 커가지고 남의 손자나 내 손자나 똑같아요. 김원석 목사님의 셋째 아들 재성이가 낳은 지 두 달 만에 왔는데 나만 보면 매지리 할머니 매지리 할머니 하면서 따랐어요. 나만 붙어 다니는 거야. 그렇게 아이가 귀염성이 있고 붙임성이 있어요. 반은 내가 키우고 반은 목사님이 키웠어요. 외할머니가 오래도 안 가요. 동네 할머니들도 제가 애기를 예뻐한다고 애기할머니라고 불렀어요.
생떼 같은 자식들 앞세우고
열다섯에 여덟 살 많은 노순필이랑 결혼했어요. 열여덟에 첫 아이를 낳았어요. 맨처음에 아들 낳고 74살 먹은 아이가 큰아들이고 그 밑에 살았으면 72살인 딸 낳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속 바꿔서 그렇게 났어요. 아들 넷, 딸이 서셋이 있었어요. 그러던 게 다 죽데요.
일하다 들어와서 애 낳고 미역국도 못 얻어먹고 시어머니는 산날 아침 해주면 그냥 가요. 애 낳고도 닷새 되면 밭에 나가 일해야지요. 몸조리도 못해 봤어요. 그걸 보면 제가 건강한 거예요.
큰아들은 아이 다 키워 놓고 중풍으로 죽었어요. 큰아들 아플 때 내가 병구완을 했어요. 세상 밖에 떨어질 때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 순서가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제가 굉장히 독한 사람이에요. 일찌감치 시집와 가지고 배때지배만 안 곯았다 뿐이지. 큰아들은 중학교 졸업하고 충주에 있으면 농사꾼밖에 더 되겠냐고 원주에 뛰들어와서 운전대를 잡았어요. 그런데 품값을 못 받아서 대신 밭을 받아 여기로 이사 왔어요. 큰아들은 4남1녀한테서 증손자가 아홉이에요.
큰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나여서 입이 괴망스럽고 밥을 안 먹어서 이웃 애들 데려다 같이 밥을 먹였어요. 밥에서 돌이 나오면 숟가락을 획 집어던져 “야 이놈아 돌멩이 있으면 돌을 집어내면 되지” 했어요. 온 식구가 그거 하나라고 하도 위해 키워서. 각각 살 때 아버지가 야단을 해도 막무가내였어요. 하루는 “어머이 애들이 나더러 갈비씨라고 놀려요. 밥 안 먹고 비쩍 마르니까.” “거봐라 돌 있다고 숟갈 내삐리고 맵다고 안 먹으니 살이 안 쪄 갈비씨라고 하고. 갈비씨라는 게 좋은 말인지 아니?” “그래요?” 그러더니 밥을 먹어요. 겪어보니 자식은 에미한테 달렸어. 인사하는 게며 모두 가르쳐야 해요.
지금은 60된 셋째 아들하고 56된 막내아들 둘 남았어요. 막내아들도 큰 차 운전을 해요. 며느리는 연세대에서 일해요. 다 잘 키워야 보람이 있는데 죽어서…. 같이 사는 막내아들은 아들이 둘이었는데 연세대에서 파놓은 웅덩이에 빠져 죽었어요.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게 지 형이 “할머니 나 백원만” 하면 “야! 할머니가 무슨 돈이 있니” 해요. 그러고 자기는 교회 가서 헌금한다고 “할머니 100원만” 해요. 아주 똑똑하고 예뻤어요. 죽은 새끼 말하면 뭐해요. 그래도 자꾸 생각나요. 살아있으면 스물 여덟이에요.
우리 영감은 60되던 해에 죽었어요. 술병인 거 같아요. 술은 먹어도 주사는 없었어요. 그거는 다행이지요. 술에 팔려 시집와서 숱한 고상을 했어요. 애를 업고 보리를 안 비었나. 남편은 보리 비다 술 먹으러 가자면 가버리고.
6·25때 제가 난 둘째 아들이 소아마비가 있어서 우리 영감이 업고 피란을 가는 거요. 시어머니가 뒤에 따라갔어요. 그랬는데 휙 돌아서면서 (남편이) 어머니는 들어가라고 그래요. 시어머니가 업은 애를 물에 집어넣고 가자버리고 가자는 뜻 그러더래. 그러니까 어머니나 들어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래. 우리 시어머니가 그래. 얘가 피란을 갔다 오더니 만날 노래만 불러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어느 날은 “어머이 어머이” 불러요. “왜 그러니” 하니 “할머니가 저 달래 가다 물에 처넣으라고 그랬지?” “에이 왜 너를 그러겠니. 손잔데 너를 물에다 처넣으라 그러겠니.” “그러면 그렇지.” 이러더라고. 애는 피란 갔다 와서 두 달 있다 죽었어요. 그다음에는 이상하게 돌 지나면 죽고. 이웃 아줌마가 그래요. 영남 사람인데 아무개 엄마는 와 낳기만 하면 죽느냐고. “죽는 걸 내가 억지로 해요?” 그랬지. “죽는 걸 어떡해요. 죽는 걸 같이 따라 죽어요?” 사람이 입도 마구 못 놀려요. 그 아줌마는 지 손자 낳는 대로 죽더라니까. 사람이 이 말 해서 오해를 받나 이해를 받나 분간해서 해야 돼요. 듣기 싫더라고요.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에야…
저는 절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고 그랬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그랬고요. 살다보니 동네 아줌마 하나가 “아줌마 우리 교회 갈라요?” 그러더라구요. “아니 교회를 뭐 하러 가요. 나는 교회도 모르고 절도 모르는데.” “아이 가보면 얘기도 듣고.” 자꾸 가자 그래요. 그래 따라 갔지유. 저보다 두 살 더 먹은 이 마누라가 사흘을 다니다 쏙 빠지네유.
안 댕기고. 저는 그래도 모르면 모르지만 발을 들여놓은 이상에야. 그래서 잘했든 못했든 3년을 다녔어요. 거기 댕기는 바람에 여기 발을 들여놨어유. 거기도 교회가 있어 3년 동안 목사님이 네 번 바뀌었어요. 한 분 한 분 자꾸 나가시더니 여자 전도사님이 와서 안 맞아서 안 나갔어요.
흥업감리교회를 세운 문창수 초대 목사님 아버님이 장로님인데 문 앞에 쓰레기 옷 거둬다가 없는 사람 주고 그랬어요. 그래저래 알게 됐는데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목사님 내외분이 병원에 오는 거예요. 유근파 집사가 이 교회 갔다 저 교회 갔다 했는데 그 양반이 알려줬나. 그 양반은 흥업침례교회에서 단짝으로 앞뒷집 있었는데 딴 데 가 있어요(김 목사가 요양원에 있다고 전한다).
18년 전쯤 심장 수술해서 한 달 이상 병원에 있었는데 퇴원했는데 집에까지 오시네요. 그래가지고 흥업감리교회에 나오게 됐지유. 지금까지 두 교회에서 목사님을 일곱 분 모셨어요. 세 번째 오신 김원석 목사님이 명예권사 직분을 주셨어요.
40년 넘게 산 집, 전기누전으로 전소
아들과 따로 살았어요. 마흔넷에 흥업면 매지리 한촌에 왔어요. 건물만 우리 꺼고 남의 터예요. 거기 잘 있어야 이태 사는데 저는 그런데 팔십 다섯까지 살았어요.
그런데 6년 전에 불이 났는데 완전히 절단났어요. 다 타버리고 하나도 남은 게 없어요. 하나님이 피난 보내신 거예요.
불나던 날 셋째 아들이 와서 “난 오늘 충주 갈란다” 하니 “어머니 충주는 별안간” 이리여. “아니 가고 싶으면 아무 때라도 가지 날 잡아놓고 가니?” “그럼 언제 오실 거여?” “몰라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그러면 나는?” “아니 니가 어린애니? 밥 해먹고 퇴근해 집에 와 에미 있나 없나 들여다보면 되지. 수제비 먹고 싶어 그 소릴 혀?” 우리 아들이 다 같은 밀가루 음식인데 국수는 안 먹어도 수제비는 잘 먹어요. 퇴근할 때 와 보고 출근할 때 들여다보는데.
아이고 그래설라매 잠을 충주 친정에서 잤어요. 올케네 집에서 자고 아침을 먹고서는 막내 여동상 집으로 갈라고 밥숟가락을 내려놓는데 전화가 뜨르르 와요. 올케가 받더라고요. 막내아들이 집에 불이 났다고 해요. 아무 일 없냐고 하니까 괜찮대요. 인명에 대해서는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한 거예요. 아들도 안 놀러오고 손자도 안 놀러왔대요. 그날 아침 별안간 친정에 가고 싶데요. 하나님이 너희 피신해라 한 거예요. 그리고 나 가던 날 불이 났으니까. 형님 집이 불에 홀랑 타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애들은 다 무사하대요. “그럼 됐어” 했어요. 사진 한 장 안 남기고 다 타버렸어요.
동상 남편이랑 동상이랑 함께 와보니 조사하고 난리가 났어요. 아들 손자를 보니까 마음문이 활짝 열렸어요. 아들이 그전에는 물건을 떼다가 슈퍼에 댔는데 3000만원 정도 집에 쌓아놨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아들이 하나도 안 아깝대요. “어머니 아무 걱정 말아요”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우리 다 살리신 거예요. 전기누전이라고 했어요. 나이가 먹어서 막내아들이 혼자 안 된다고 해서 6, 7개월 전부터 같이 살아요.
수술해도 일을 그렇게 해도 하나 아프지 않았어요. 근데 4년째 일을 못하고 있어요. 농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남을 다 줬대요. 다 주고 50평 정도에 고추 농사를 지었는데 1년 넘게 가보지도 못했어요. 3년 전 눈 많이 온 날에는 집 앞에서 미끄러져 갈비뼈 하나는 부러지고 하나는 금이 갔어요.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목사님이 새벽기도 시간에 데리러 오셔서 한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혹시나 하면 불을 번쩍번쩍 하면서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지난 10월부터는 교회에 못 나오고 있어요. 새벽기도에는 못 나와도 4시40분이면 꼭 일어나요. 그러면 교회 위해 목사님 위해 성도님들 위해 기도해요.
“교회 목사님들 다 건강하시고 사랑으로 세운 흥업감리교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날로 날로 부흥역사 이루어주시옵길 간절히 원하옵고 기도드립니다. 성도님들 한 분 한 분 빠짐없이 성령님의 뜨거우신 불 같은 기둥이 될 감동을 주시옵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하신 나라로, 아버지 따뜻한 품안에 갈 때까지 건강주시고 깨끗한 몸을 주시길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저의 기도에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 흥업감리교회는
1995년 7월 25일 문창수 목사가 세웠다. 현재 김원석 담임목사는 3대 목사로 2004년 부임했다.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을 세우기를 꿈꾸며 올해 표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정했다. 김 목사의 목회 비전은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들고 성경적인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예배, 말씀, 성령 충만, 전도 선교, 재정적인 회복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1년에 1회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관광을 시켜드리는 등 지역사회에서도 열심히 섬기고 있다. 제적 교인은 장년만 70여명으로 유초등부를 포함하면 100명이 넘는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흥업3리 467-3 당골길(033-762-3054).
원주=글 최영경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