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 소년, 창공을 날다… 아시아나항공 박래백 기장
입력 2011-05-18 18:04
1963년 9월, 아버지는 죽으면서 눈을 감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내인 어머니를 잃고 술독에 빠져 살다 기어이 사달이 났다. 아버지가 잊지 못한 어머니는 2년 전 독사했다. 집에선 빈 병을 각종 용기로 재활용했는데 아마 그 중 하나에 보관한 양잿물을 잘못 마셨을 것이라고 어른들이 수군대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열 살 적었다. 젊은 아내의 비명횡사에 아버지는 술을 퍼야 했을 것이다.
죽은 아버지의 눈꺼풀은 3남2녀 중 막내아들이 쓸어내렸다. 여덟 살의 작은 손으로도, 태산 같던 아버지의 눈을 감기는 건 쉬웠다. 눈자위는 마르지 않아 미끄러웠고 아버지의 얼굴은 크고 더웠다.
가난
막내 박래백은 결혼한 누나와 형이 번갈아 키웠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굶주린 채 학교에서 귀가하면 먹을 게 없어 물로 허기를 채웠다. 집에서 호박죽을 끓이면 제 몫을 받을 때까지 눈치만 봤다.
자식이 있는 누나와 형의 집에서 막내는 기를 못 폈다. 수럭스러워서 반장과 학생회장을 도맡았지만 집에서는 말이 적었다. 큰누나가 어느 날 말했다. “너는 왜 말을 안 하니. 입 열면 냄새나는 사람처럼 말이 없구나.” 누나는 부모 같았지만 아이에게 부모와 부모 같은 것은 달랐다. 매년 초 담임교사가 내준 설문지에는 가족란이 있었는데 부모 이름을 적는 칸은 고아라는 사실을 자각시켰다.
국민학생(지금 초등학생) 때 공을 잘 찼다. 4학년 때 축구부 감독이 부르더니 주장을 시켰다. 시합에 나가서 승리를 이끌었다. 축구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전주북중, 전주고를 다니면서도 축구공을 달고 살았다. 고교 1학년 때 전주서문교회에서 선수로 뛰어 달라고 했다. 교회 대항 시합이 있었다. 그러다 교회를 다녔고 성가대를 했다. 가난하고 외롭게 자란 막내는 성경 구절과 기도로 위로받았다.
고교 2학년 말 붉은색 머플러를 목에 감은 졸업생들이 학교에 왔다. 공군사관생도였다. 예비 장교라는 인상 탓에 덩치보다 커 보이던 선배들은 “학비가 안 든다”고 자기네 학교를 소개했다. 다른 설명도 많았는데 그 말만 기억됐다. 형과 누나에게 부담주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듬해 시험 전날 난생 처음 고속버스를 탔다. 서울 대방동 공군사관학교 앞 여관에서 큰형과 동숙했고 합격했다. 입학 전 큰형과 형수는 결혼반지 한 쌍을 팔아 막내의 썩은 이를 새 이로 갈아줬다.
비상(飛上)
공사 생도 박래백은 두들겨 맞아서 엉덩이에 피멍이 든 채 엎어져 자는 날이 많았다. 75년 공사 27기로 입학해 1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 축구선수로 뛰었는데 고교 축구부와 붙어서 지면 맞았다. 매일 단내가 나도록 훈련받으면서도 매질을 당했다. 영내의 삶은 엄격했고 생도에겐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자퇴를 선언한 동기는 정신 이상자로 몰려 퇴교됐다. 불명예였다. 함부로 그만둘 수 없었다.
매달 첫 주 토요일 오후 동기들과 외출하면 한 달 용돈을 다 쓰고 복귀했다. 주로 종로에서 놀았다. 여대생들과 단체로 만나 돈가스를 먹었다. 돈가스는 그 시절 청춘에게 최고 음식이었다. 음악다방에 가면 피로에 눌려 실컷 잤다. 다음달까지 남은 주말은 영내 식당 밥을 먹으며 책과 씨름했다.
79년 졸업 후 전투기 조종 훈련에 들어갔다. 소위로 임관했지만 비행훈련을 받는 학생이었다. 첫 3개월간 대전 부대에서 경비행기 조종을 배웠다. 처음 이륙할 때 정신을 못 차렸다. 평면을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 비행기는 위아래로 기울었다. 착륙하면 토하는 동기가 많았다. 10% 이상 탈락했다.
이어 경남 사천비행장에서 훈련용 제트기 6개월 과정을 마치고 경북 예천비행장에서 F-5 전투기를 만났다. 사격과 침투 등 실전을 가장한 훈련이 시작됐다. 음속을 돌파할 때 실핏줄이 터졌다. 시야는 좁아졌고 구름 위로 스키를 타는 듯했다. 허공을 가르는 굉음은 뒤로 밀려나 운전석은 고요했다.
훈련 막바지 서해상에서 공중사격 중 전투기들은 먹구름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한 전투기가 삼각형 표적을 끌면 다른 서너 대가 기관총을 갈기고 빠지는 훈련이었다. 시야가 열린 하늘에서 전투기 두 대가 병렬로 돌진해 왔다. 그들 사이로 피하지 못했다면 공중분해됐을 것이다. 80년 말 훈련을 마치고 빨간 머플러를 받았다. 임관 동기 122명 중 절반이 남았고 이후 6명이 비행 중 순직했다.
장교와 간호사
경기도 수원 제10전투비행단에서 근무하다 82년 비행 교관으로 차출됐다. 발령지는 사천비행장이었다. 3년 전 이곳에서 훈련받던 때 주말이면 동료들과 진주시내를 활보했었다. 당시 누가 제안했다. “한 시간 뒤 촉석루에서 만나자. 파트너를 데려와라.” 그때 길에서 꾀었던 스무 살 여대생 오미령을 다시 간 진주에서 재회했다. 간호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예뻐서 ‘(병원) 5층 오 간호사’로 유명했다.
공사 동기가 사천과 진주를 오가며 중매했다. 공군 대위 박래백과 간호사 오미령의 혼사는 영호남을 가로질러야 했다. 껌을 씹어도 경상도 사람은 롯데만, 전라도 사람은 해태만 찾던 때였다. 박 대위의 큰형은 “전주에도 여자가 많은데 왜 하필 경상도냐”고 했다. 두 사람은 83년 결혼했다.
딸 지은이는 이듬해 태어났다. 박 대위는 성실했지만 자상한 가장은 아니었다. 훈련이 끝나면 회식 자리에서 밤을 샜고 주말엔 동료들과 골프를 친다며 집밖을 나돌았다. 공사 훈육관이던 88년 국방부 지원으로 가족을 데리고 유학했다. 2년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미국의 주말에는 가족만 곁에 남았다. 처자와 주말을 보냈고 함께 여행했다. 가장의 역할을 알게 됐다.
쓴맛
93년 민간 항공사 아시아나항공에서 입사를 제의했다. 중령 3년차로 국방부에 있을 때였다. 1년간 고민하다 이듬해 7월 전역하고 회사원이 됐다. 적응은 생각보다 벅찼다. 모든 비행 자격을 새로 따야 했다. 여객기와 전투기는 달랐다. 여객기 조종사는 목숨을 손에 쥔 사람이 300∼400명이었다.
민간 조종사 전환 교육을 거쳐 부기장이 되는 데 1년 걸렸다. 비행 교관일 때 훈련시킨 후배들이 먼저 입사해 기장으로 있었다. 역전된 관계에서 나오는 상호 존대는 어색했다. 종종 꾸지람을 들었다. 부기장은 기장에게 잘 보여야 했다. 기장은 승급 평가관이기도 했다. 98년 기장을 달았다. 여객기는 전투기보다 안전했지만 생사가 종이 한 장 차로 맞붙은 삶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박 기장의 여객기 조종 경력은 올해 17년째로 전투기 경력 16년을 넘어섰다. 도합 33년간 비행기를 몰았다. 1만2000시간 하늘을 날았고, 지구를 300바퀴 돌았다. 지금도 매달 지구를 한 바퀴씩 돈다.
가족
15일 경기도 고양의 자택에서 만난 박래백(56) 기장은 “전투 조종사가 멋있다”면서도 “그땐 뭣 모르니까 했지, 지금 하라면 못할 것”이라며 파안대소했다. 훈련 도중 죽을 뻔한 일을 말한 뒤였다.
박 기장은 지난 11일 미국 시카고행 여객기 보잉777을 몰고 나갔다가 이날 새벽 귀국했다. 장로인 그는 인터뷰 전 쪽잠을 자고 아내 오미령(52)씨와 인근 화평교회에서 예배와 모임을 마쳤다. 박 기장은 98년 9월 교회에서 부부 중심 소모임에 참석하며 가정과 이웃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가족의 소중함을 깨칠 때까지 제 목표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가정에 소홀했고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죠. 이웃과 어울리면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 더 가치 있는 삶을 고민하게 됐어요.”
박 기장은 “아내에겐 남편, 남편에겐 아내, 아이들에겐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가정이 깨지면 상처는 가장 약한 아이들이 받는다”고 했다. 대화 도중 그의 아들 지훈(16)군이 교회에서 돌아왔다.
“늦둥이 아들인데 볼 때마다 큰형님 집에서 살던 제 어릴 적 생각이 나요. 가정이 버팀목이 되려면 건강해야 해요. 이웃을 찾아가 가족 간에 닫힌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게 이젠 제 역할 같습니다.”
긴 대화를 마치고 박 기장과 식사했다. 여독이 몰려오는지 안경을 벗은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고양=글 강창욱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