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 숲·계곡길… 별 만나는 ‘보현산 하늘길’

입력 2011-05-18 17:31


경북 영천 보현산 천문대 여정

“아주까리 동배야 더 많이 열려라/산골집 큰애기 신바람난다/아라린가 스라린가 영천인가/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머루야 다래야 더 많이 열려라/산골집 큰애기 신바람난다/아라린가 스라린가 영천인가/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2000년 6월 18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북한 어린이 공연단이 흥겨운 가락으로 불러 화제를 모았던 ‘영천아리랑’이다. 당시 영천이 어느 지역인지 논란이 있었지만 북한 문헌에는 대구 인근의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 ‘영천아리랑’의 무대라고 밝히고 있다.

이수삼산(二水三山)의 고장 영천에 본래 ‘영천아리랑’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주로 이주한 영천 출신 농민들이 두고 온 고향산천이 그리워 ‘영천’이라는 지명을 넣어 불렀던 아리랑이 훗날 만주에서 북한으로 흘러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고향 영천으로 당당하게 귀환했다.

보현산 천문대에 오르는 ‘보현산 하늘길’은 아리랑 고개보다 더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산길이다. 출발점은 화북면 자천리의 오리장림(五里長林). 천연기념물 제404호로 지정된 오리장림은 400여년 전 고현천 변에 조성된 방풍림으로 길이가 오리(2㎞)에 이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왕버드나무를 비롯해 팽나무, 곰솔, 회화나무, 느티나무 등 노거수들이 울창한 오리장림의 현재 길이는 약 500m. 최고령 나무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가시버시가 되어 300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연리목으로 초록물이 뚝뚝 떨어지는 숲에는 나그네에게 쉼표를 찍고 가라고 빈 벤치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오리장림이 끝나자마자 만나는 화북면 소재지는 아담한 시골마을이다. 시간이 정지한 듯 1970년대의 풍경이 오롯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은 자천교회의 나무종탑. 돌담길 골목 끝에 위치한 자천교회는 1904년에 건축된 한옥교회로 일제강점기 때는 가마니 공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쓰이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미군의 공습이 임박하자 교인들이 지붕에 횟가루로 ‘CHURCH’라고 써 폭격을 피한 일화도 전해온다.

요즘도 주일마다 나무종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는 자천교회는 남녀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내부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도 설치되어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을 반영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모습과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천교회는 용마루가 짧고 지붕이 넓은 우진각지붕을 채택하는 등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천교회의 종소리를 뒤로 한 ‘보현산 하늘길’은 화북면 횡계리에서 횡계구곡(橫溪九曲)을 벗한다. 횡계구곡은 조선 숙종 때의 성리학자인 정만양·정규양 형제가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구곡원림. 2㎞ 길이의 시냇물과 계곡을 따라 쌍계, 공암, 태고와, 옥간정, 와룡암, 벽만, 신제, 채약동, 고암 등 9개의 절경이 수백 미터 간격으로 이어진다.

횡계구곡 중 으뜸은 4곡인 옥간정과 5곡인 와룡암. 보현산에서 발원한 청류가 와룡암을 휘돌아 흐르며 하얗게 부서지는 소리에 심신마저 청량해진다. 형제는 와룡암의 정취에 반해 “오곡이라 구불구불 경계가 더욱 깊고/와룡암 위에는 푸른 숲이 덮여 있네/구름을 일으켜 비 내림은 너의 일 아니니/완연히 자재(自在)의 마음에 맡겨 놓을지다”고 노래했다.

사시사철 햇볕이 드는 양지마을의 투박한 돌담길과 반대로 늘 그늘이 지는 음지마을 앞 도로를 달리면 보현산 정상의 천문대가 빤히 올려다 보이는 정각리 별빛마을. 마을에 보현산천문과학관이 들어서고 별빛축제가 열리더니 최근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등 별과 우주를 주제로 담장에 벽화가 그려져 마을 전체가 동화책으로 변신했다.

‘보현산 하늘길’은 정각리 별빛마을에서 보현산 천문대까지 찻길과 임도로 갈라진다. 별빛마을에서 보현산 천문대까지 자동차로 달리는 천수누림길은 9.3㎞. 구들장길로 명명된 임도는 보현산 8부 능선의 쉼터까지 5㎞로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짙어가는 보현산의 자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들장길은 온돌의 구들을 캐던 채석장이 있어 명명됐다.

‘보현산 하늘길’은 구들장길의 쉼터와 만나기 전에 몇 차례 S자를 그린다. 경사가 워낙 가팔라 모롱이를 돌 때마다 하늘로 빨려드는 느낌이다. 길섶에는 할미꽃과 산철쭉을 비롯해 온갖 야생화들이 천상의 화원을 연출한다. 천문대에 오르기 전 길은 또 한번 연속으로 S자를 그리며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환상에 젖게 한다.

길은 보현산 천문대 입구에서 보현산 정상인 시루봉(1124m)까지 1㎞ 길이의 데크로 연결되어 있다. 양지꽃, 민들레꽃, 제비꽃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데크를 꿈길처럼 산책하다보면 어느새 조선시대의 관천대(觀天臺)가 있던 시루봉이 나온다. 거센 바람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시루봉에 서면 팔공산 오봉산 채약산 기륭산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곳에서 맞는 해돋이와 해맞이도 장관이다.

1996년 4월에 탄생한 보현산 천문대는 국내 최대 구경인 1.8m 반사망원경과 태양플레어 망원경이 설치된 광학천문관측의 중심지. 우리나라에서 발견해 ‘통일’ ‘보현산’ ‘장영실’ 등 우리말 이름이 붙은 소행성 12개 중 11개가 산신령처럼 머리가 허연 전영범 천문대장의 작품이다.

보현산 천문대와 정각리 별빛마을의 하루는 민들레꽃을 닮은 노란별이 뜨면서 시작된다. 밤하늘 반딧불처럼 깜빡이는 별빛이 온 몸을 감싼다. 직녀별은 26만 년 전의 빛이고, 백조자리 꼬리별인 데네브는 1600만 년 전의 빛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태초의 빛이 쏟아지는 보현산 자락. 그곳에는 횡계구곡에서 글을 읽던 선비들의 낭랑한 목소리와 자천교회의 은은한 종소리, 그리고 고향을 그리는 ‘영천아리랑’의 애절한 가락이 별빛에 묻어난다.

영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