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연출가 윤정환씨 “80년 5월은 잘못 만들어진 짬뽕 같은 세상… 5·18, 블랙코미디에 대입시켜봤어요”
입력 2011-05-17 19:42
“5·18 민주화운동은 절대 웃기는 코미디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엄청난 코미디라고 생각했어요. 있어서는 안 될 일인데 일어나버렸고, 황당하게 진행됐으니까요. 그래서 이 아픈 역사를 블랙코미디에 대입시켜 보기로 했습니다.”
연극연출가 윤정환(39)씨는 소박한 사람들이 짬뽕 한 그릇 때문에 5·18이 일어났다고 믿으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연극 ‘짬뽕’을 만들어 지난 12일부터 관객과 만나고 있다. 2004년 처음 무대에 올린 ‘짬뽕’은 올해 신촌연극제 선정작으로 뽑혔다. 무거운 소재를 부담스럽지 않게 다뤄 웃음을 던지면서도 소시민이 거대한 비극에 휘말려 희생되는 과정을 가슴 찡하게 그렸다는 호평을 받았다.
윤씨는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역사 속에 어떤 진실이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강원도 태백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윤씨는 여덟 살이 되던 1980년 4월 어느 날 사북에 다녀온 어머니로부터 “사북은 이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그 일이 사북사태였던 것을 알았다.
“당시 최대 탄광이었던 동원탄좌 광부들이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하다 곡괭이 자루로 두들겨 맞은 사건이에요.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탄광에서 그런 일을 당한 거죠. 역사는 사북사태를 ‘광부들의 소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 5·18이 터졌다. 윤씨는 “사북사태를 보도하지 않은 언론은 5·18 때도 진실을 쓰지 않았다”며 “그해 5월이 한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한 윤씨는 2002년 5월부터 작품을 썼다. “하필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월드컵 때문에 온 국민이 기뻐하던 5월이에요. 국민을 이렇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뭘까라고 생각하다가 5·18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국민이 고난과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얻어낸 것이죠.”
그렇게 만든 ‘짬뽕’은 초연 이후 1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윤씨는 2004년 한국희곡작가협회에서 주관하는 신인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꾸준한 호평 덕분에 올해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일이 잘 안 풀릴 때 ‘짬뽕 같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속을 풀어줘야 하는데 무언가 잘못 뒤섞여 맛없는 짬뽕이 된 게 5·18이에요. 80년 5월은 잘못 만들어진 짬뽕 같은 세상이었어요.”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