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공적1호 사라진 후… 對중동정책 투트랙으로 간다
입력 2011-05-17 21:56
美, 빈 라덴 사살 이후 ‘테러와의 전쟁’ 틀 바꾸나
“이 전쟁은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무슬림의 리더가 아니며, 알카에다는 무고한 무슬림을 살육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빈 라덴 사살 직후 이슬람권을 의식해 한 발언이다. 이 발언은 앞으로 미국의 대(對)중동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빈 라덴의 죽음은 9·11테러 발생 10년 만에 미국으로 하여금 이슬람권과의 관계 재정립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중동·북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주화 봉기와 맞물려 기존 외교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을 맞았다.
미국은 일단 기존의 대테러 전략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단기적으로는 보복 테러나 미국 내 자생적 테러 발생 가능성이 높아 전략이 더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언급처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이슬람권 국민들을 떼놓는 차별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대테러 전략을 강화하는 한편, ‘테러의 시대는 끝났다’는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하는 것이다. 이른바 중동에 대한 투트랙 전략이다.
◇대테러 전략, 일단 변화 없다=미 정보당국은 알카에다나 이슬람 과격 단체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테러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데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보복 테러나 미국 내 자생적 테러 가능성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국토안보부는 테러 경보를 공식 격상하진 않았다. 테러 경보 격상은 그만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일상생활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대테러 조치를 강화했다.
대테러 당국이 빈 라덴 사망 이후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미국 주요 도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톨이 늑대(lone-wolf)’형 테러이다. 이들 자생적 테러리스트들은 알카에다나 테러 조직과는 상관없이 단독 또는 소수 그룹으로 독자 행동을 한다. 프로농구(NBA) 플레이오프 경기나 프로야구(MLB) 경기는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마이클 다우닝 대테러담당 부국장은 “외톨이 늑대들이 빈 라덴 사망을 테러행위 정당화 명분으로 삼고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말했다.
◇서방 vs 이슬람 구도, 타파한다=미국의 향후 외교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 재설정이다. 특히 중동·북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주화 봉기와 맞물려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미국 내 이슬람 전문가들은 “빈 라덴 죽음과 ‘아랍의 봄’ 상황은 이슬람 세계가 변화의 기로에 서있음을 의미한다”며 “이것은 미국의 이슬람 정책도 바뀌어야 하는 시점이 됐다는 뜻”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미국은 알카에다 같은 테러 세력이 더 이상 이슬람권 민주화 봉기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강조한다. 대규모 미국민 살상을 통해 미국의 중동 정책에 영향을 주려는 빈 라덴 방식이 이미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랍의 봄’ 상황에서 점진적 민주화와 자국의 안보 이익을 동시에 연착륙시키려는 미국의 노력들이 예상된다. 일부 중동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슬람권 국가들의 민주화 움직임에 좀 더 적극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르면 19일 이슬람권 국가들과의 관계 재정립 등 중동 정책 전반에 대해 중대 연설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도 조만간 대통령의 중대 연설이 있을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미 외교 정책의 변화엔 교착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아랍 간 평화협상 재개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미국은 아프간 전략에 대해선 또다시 고민할 가능성이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빈 라덴의 죽음이 의회 행정부 군부 내에서 아프간전 전략, 테러와의 전쟁 목표, 전쟁비용 등을 재평가하는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럴 경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군 시기 및 규모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격변하는 지역 정세, 고민하는 미국=빈 라덴 제거작전 이후 이슬람권 유일의 핵보유국 파키스탄이 미국에 반발하고 있다. 파키스탄에 아주 비우호적인 인도는 아프간에 20억 달러의 대규모 원조를 약속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미·파키스탄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며 파키스탄에 적극 다가서고 있다.
빈 라덴 사후 중동-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지역들의 정세 변화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가장 큰 핵심 안보이익이 걸린 지역이다.
파키스탄은 알카에다와 전쟁 중인 미국의 가장 핵심 파트너 국가다. 파키스탄 외무부가 양국 대테러 공조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조만간 파키스탄을 방문할 예정이지만, 전적으로 신뢰할 정도는 아니다.
파키스탄과의 협조에 변화가 있을 경우 미국의 대테러 전략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군사력을 빼고, 대테러 전쟁을 마무리 국면으로 이끌고 간다면 파키스탄의 중요도는 전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워싱턴 외교 전문가는 “지난해 워싱턴을 국빈 방문할 정도로 가까워진 미국·인도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파키스탄과 중국이 가까워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면서 “중동과 서남아시아를 아우르는 정세변화는 미국의 중동 정책을 재검토하게 만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