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대 조선대 명예교수, 5·18 계엄군 총탄에 숨진 아들 모교에 30년째 장학금

입력 2011-05-16 19:16

“귀엽던 막내아들의 나이테를 기억하고 싶어 장학금을 내기 시작한 게 어느덧 30년이 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의 조준사격으로 숨진 아들의 모교 등 4곳에 매년 2월 장학금을 꼬박꼬박 지급해온 임병대(84·조선대 명예교수)씨의 가슴 아픈 사연이 감동을 주고 있다.

원광대 한의대 본과 2학년이던 임씨의 셋째 아들 균수(당시 21세)씨가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옥상에서 날아온 계엄군 총탄에 머리가 관통돼 숨진 것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3시쯤.

균수씨는 조선대 토목학과 교수이던 아버지와 같은 대학에 다니던 둘째형 양수씨를 만나러 전북 익산에서 광주를 찾았다. 평소 민주화를 위한 학내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균수씨는 자연스럽게 금남로에 운집한 시민대열에 합류했고 계엄군과 시민군 간의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졌다.

이튿날 기독교병원 영안실에서 아들의 시신을 발견한 아버지는 오열했다. 이듬해부터 임씨는 아들이 다녔던 학교들에 장학금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들이 한의사의 꿈을 키우던 원광대 한의대에 100만원, 아들이 졸업한 전북 순창북중학교와 같은 재단인 순창고에 각 50만원 등 100만원, 아들의 모교인 광주 인성고에 50만원 등 매년 250만원씩의 장학금을 정기적으로 기부해왔다. 조선대를 정년퇴직한 1993년 이후에도 아들의 5·18보상금 7000만원과 자신의 퇴직금을 더해 사들인 광주 중흥동 상가 한 채의 임대료를 적립해 장학금을 내놓고 있다.

임씨는 “용돈을 주면 그 돈을 모았다가 방학 때 학원 수강료로 사용했을 만큼 성실하고 어른스러운 막내아들이었다”며 “못다 핀 채 스러진 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내가 죽더라도 장학금이 계속 지급되도록 해놓았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