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건용] 상대평가에 대하여
입력 2011-05-16 17:36
“숨막히는 서바이벌 게임…하위 30%를 지옥에 보낸다면 세상이 좀 나아질는지”
음악회장에서 오랜만에 보는 후배 음악가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가 옛날에 주었던 성적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음악대학에 들어오는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어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 나로부터 매우 박한 성적을 받았다고 계면쩍어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열 중 일고여덟은 앞의 경우다. 그렇다면 뭔가 잘못되었다. 지금까지 악단에 남아 활동한다면 그들은 성공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 중 다수가 학부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면 나의 평가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80년대에는 졸업정원제라는 것이 있었다. 입학생을 130퍼센트 받아서 100퍼센트만 졸업시키는 제도였다. 취지는 대입 경쟁의 치열함을 완화시키는 대신 재학시절의 면학분위기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재학생 가운데 30퍼센트를 탈락시켜야 하므로 자연히 성적관리가 중요했고 교수들에게는 상대평가가 엄격하게 요구되었다. 내가 100명의 수강생들을 가르친다면 그 중 20명에게만 A학점을, 또 30명에게만 B학점을 줄 수 있었고 나머지는 C학점 아래로 주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거의 10년간 이러한 과목을 담당했었다.
학기말 시험의 답안지나 레포트를 받아보면 교수들은 나름대로의 감이 있어서 어떤 것이 좋은 성적을 받을 것인지 금방 안다. 질문의 요지를 파악했는가, 조리 있게 대답했는가, 필요한 정보를 언급했는가를 본다. 분량이 성의 있으면 더 좋다. 깨끗한 글씨도 호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성적을 주다가 이따금 회의가 든다. “좋은 성적을 주기는 하지만 이 학생이 실은 점수벌레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닌가? 저 빈약해 보이는 레포트를 낸 친구가 사실은 앞으로 악단을 이끌어 갈 친구 아닐까?” 그렇지만 이 감에 의거해 성적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부독재정권이 대학을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서 도입했다는 졸업정원제는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아 10년도 못 가서 폐지되었지만 지금도 상대평가제는 곳곳에서 일반적으로 쓰인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련의 자살사건 때문에 알게 된 카이스트가 그 예이다. 하위 30퍼센트의 학생들은 등록금을 다른 학생보다 더 내는 ‘징벌적 등록금제도’가 학생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대평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자살 사건 이후 없애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지만 실은 그 제도 중에 학생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징벌적 등록금이 아니라 반드시 하위 30퍼센트를 골라내는 상대평가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하위 30퍼센트에 속하게 되므로 필사적으로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숨막히는 서바이벌 게임이 모두 영재를 자처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게 된다.
최근 10년간 나는 10명 내외의 클래스를 몇 과목 가르친다. 이제는 상대평가를 하지 않는다. 학기말 시험도 없다. 수가 많지 않으니 매 시간 과제를 내 주고 그것을 받아 평가하고 돌려준다. 누가 어떻게 공부하는지 지속적으로 기록해 둔다. 이를 토대로 학기말에 성적을 내보면 A학점이 많고 B C학점은 적다. 그리고 F가 꽤 있다. 말하자면 중간은 적고 양 극이 많은 형태이다. 중간 정도를 가는 학생들은 더 자극을 주고 독려를 해서 A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든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보라고 권하며 F를 준다.
지금의 이러한 평가가 20∼30년 전에 했던 나의 평가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인가? 그때 활동하는 후배 음악가들은 나에게서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일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다행히 사후세계에서는 상대평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 된다. 다행이다. 하기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위 30퍼센트는 반드시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착해져서 세상이 좀 더 나아질는지.
이건용(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