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버틸 詩碑들 곳곳에 잘못된 번역 그냥 넘길 순 없지요
입력 2011-05-16 17:56
한시 번역 오류 찾아다니는 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 연구원
지방자치제는 온갖 지역 축제와 함께 ‘이것’의 전성시대를 가져왔다. 명승고적과 관광지 입구에 으레 하나씩 세워진 이것. 멋지군, 유람객은 스쳐지나가는 것. 하지만 한국고전번역원 정선용(54) 수석연구위원은 이걸 예사로 보아 넘기지 못한다. 직업병이 분명했다. 정 위원은 1985년 민족문화추진회이던 한국고전번역원에 입사한 이래 조선왕조실록과 고문집 번역에 매달려온 26년차 번역가.
“출근하면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는 정 위원의 눈에 어느 날 문경새재의 시비(詩碑·시를 새긴 비석) 하나가 걸렸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한시(漢詩)가 새겨진 비석은 근사했지만, 번역은 뜻도 통하지 않았다.
찾아보니 문경새재만이 아니었다. 지난 4~5년간 정 위원은 전국 곳곳에 세워진 시비 30여기에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대형 오류들을 찾아냈다. 한두 글자 틀린 것, 해석의 여지가 있는 건 논외로 쳤다. “이건 너무 심하게 틀려서 넘어가기 어렵다”는 것만 셈했는데 이 정도였다.
정 위원은 “몇몇 시비는 죄다 틀려서 차라리 없는 게 더 낫겠더라. 아예 깨버려야 할 정도로 번역이 엉망인 게 열 가운데 하나는 되고, 부분적으로 틀려서 고쳐야 할 시비가 내가 본 시비의 30%쯤 된다”고 말했다. “뭐가, 어떻게,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조사해 볼 ‘시비 조사 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할 판입니다.”
천년을 이겨낼 ‘견고한’ 오류들
경기 양평군 용문산국립관광지에 조성된 한시공원에는 조선 시대의 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쓴 한시 한 편이 새겨져있다. 양평군이 축제까지 하며 특산물로 밀고 있는 용문산 나물이 소재. 시비는 제목부터 잘못됐다. 원 제목은 ‘용문승유선향연소사기(龍門僧惟善餉軟蔬謝寄)’인데, 시비는 향(餉)을 쇠금변의 향(餉)으로 잘못 새겼다.
오역은 시를 쓴 뜻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방장(方丈), 영(榮), 과(?) 같은 글자들이 함정이었다. 번역자는 ‘방장’을 ‘절의 살림을 관장하는 주지스님’으로 이해했다. 정 위원은 “방장에 이런 뜻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에서는 ‘맹자’에 나온 말로 ‘음식이 아주 많이 차려진 것’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영’도 부귀영화가 아니라 처마를 뜻한다.
사소한 실수는 시를 어떻게 바꿨을까. 원래 시 속 화자는 ‘용문산 산나물을 먹으니 상 가득 고량진미가 부럽지 않다. 소박한 음식 먹고 처마 아래서 햇볕을 쬐는 행복’을 말했다. 시비에서는 ‘주지스님이 보내준 푸짐한 음식(용문산 나물)을 먹고 나니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가 됐다.
경포대(강원도 강릉) 옆에 세워진 조선 중기 문신 이정암(李廷?·1541∼1600)의 작품에서는 한시에서만 쓰이는 쟁사(爭似)의 용례 때문에 실수가 벌어졌다. ‘A爭似B’는 ‘A가 어찌 B만큼 좋겠느냐’는 뜻. 시비에는 ‘A와 B가 다툰다’로 해석됐다. ‘중국에 있는 감호라는 호수보다 경포대가 훨씬 아름답다’는 내용이 첫줄부터 ‘감호와 경포가 아름다움을 다툰다’는 식으로 잘못 번역됐다.
몽땅 잘못된 ‘완벽한 오역’의 사례도 있다. 문경새재 3관문 부근에 세워진 김종직의 ‘새재를 지나는 길에(過鳥嶺)’는 여덟 구절 중 제대로 번역된 게 한 구절도 없었다. 탄금정(충북 충주)의 임상덕(林象德·1683∼1719) 시는 원문 오류가 8군데나 된다. 산(?)을 잠(潛)으로, 묘(廟)를 묘(墓)로, 반(斑)을 반(班)으로 썼다. 비슷한 모양의 한자와 독음이 같은 한자들이 뒤섞였다. 56글자 중 8자가 틀렸으니 본문 한자의 14%가 잘못 새겨진 것이다. 번역 역시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용문산 시비공원에 세워진 17기 시비의 총 제작비용은 1억원. 10여기를 세운 경포대 조성비용도 엇비슷하다. 최고급 대리석에 유명 서예가의 글씨까지 받은 대작이라면 한 기를 세우는 데 수천만 원이 들기도 한다. 거액을 투자해 천년 세월을 버틸 시비를 만들었는데, 그게 엉터리였다. 오역까지 천년을 가게 생겼다.
한시(漢詩), 한 글자의 위력
엉터리 시비가 많은 건 한시 번역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 위원은 “한시에서 한 글자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한자 좀 안다고 한번 쓱 읽고 번역하면 100% 오류가 난다. 수십 년 한시를 번역해온 나도 시 한편 가지고 하루 종일 헤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시 번역 전 학습은 필수다. 저자 이력과 역사, 시대를 공부하고 나면 그때, 그 공간으로 역사적, 심리적 공간이동을 해야 한다. 고사 독해도 쉽지는 않다.
“새옹지마라면 누구나 아는 고사 같지요? 새마라고도 하고, 북마라고도 하고 한시에 사용되는 새옹지마 용례만 20가지가 넘지요. 그게 새옹지마의 고사라는 걸 눈치 채는 게 쉽지 않아요. 딱 한 글자예요. 한 글자 잘못 해독하면 전체가 오역이 되기도 하는 게 한시입니다.”
자료로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현장을 직접 찾기도 한다. 지난해 1년 동안 매달린 ‘향산집’(조선 말기 문신 이만도의 문집)을 번역할 때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지명 때문에 2박3일 현지답사를 2차례 다녀왔다. 그렇게 애쓰고도 정 위원은 “내가 생각해도 오류투성이일 것 같다”며 자신 없어 한다.
이렇게 어려우니 번역할 사람도, 팔아서 수지 맞출 출판사도 찾기가 어렵다.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학과 사상의 집적물 중 95%는 한문이에요. 그걸 해독하지 못한다는 건 과거 전체를 잊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고전 번역은 국가적 사업입니다.”
“나라고 오역이 없겠나”
정 위원은 지난 6일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한 오역부터 얘기하자”고 했다. 대한항공 광고에 나와 유명해진 ‘자사 왈, 등고자비(登高自卑)’.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의 고사인데, 입사 초기 이걸 ‘높은 데 올라보니 내가 하찮아보인다’고 번역했다.
“내가 한 번역에는 왜 틀린 게 없겠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 화끈거리는 번역이, 나도 꽤 있어요(웃음). 번역원의 번역에도 오류가 무수히 많을 거예요. 오역은 피할 수 없는 거예요.”
한 언어와 다른 언어의 사이. 그 심연에서 의미는 종종 실종된다. 그러나 오역이 불가피하다는 말이, 오역을 관용하자는 뜻으로 오해돼선 곤란하다. 거꾸로, 번역이 어려울수록 오류는 더 활발하게 지적되고 수정해야 한다. 정 위원이 시비 오역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폭로’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틀린 건 알려주고 고쳐야 해요. 한번 잘못 번역된 문장은 계속 이어집니다. 후학을 위해서라도 오역이 확대 재생산되는 건 막아야지요. 기회가 되면 논문이나 책에 인용된 한시 번역의 오류까지 다 찾아서 책을 낼 계획인데 그 때도 제 실수부터 보여줄 생각입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