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나누는 사람들-(18) 물류센터 직원 정재원씨] ‘누리의 집’ 7년째 인연… 이젠 가족입니다

입력 2011-05-16 21:24


“이거 그냥 심으면 되나요? 원장님.”

“삽으로 구멍을 좀 깊게 파고 심어요.. ”

“아저씨, 여기다 심으세요.”

“아저씨가 뭐야! 삼촌이라니까.”

“으흐흐… 삼촌! 잘 심어보시라니까요.”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지난 13일 오후, 경기도 여주 오산리에 있는 ‘누리의 집’ 앞마당은 떠들썩했다. 비가 내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비보다 더 고약한 황사가 몰아치더니 이날은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했다.

로레알코리아 물류센터 정재원(39) 과장은 “날씨가 좋아 꼭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동료들과 들렀다”고 했다. 누리의 집 이화형(67) 원장은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는데…”하며 고개를 갸웃하다 “이왕 왔으니 오이 모종이나 심고 가라”고 했다. 이 원장이 모종을 준비하는데 마침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6명이 ‘함께 심겠다’고 나섰다.

제법 흙도 파고, 모종도 꼼꼼히 심는 아이들을 보면서 임희선(38) 과장은 “콩알 만했던 녀석들이 제법이네”하면서 대견스러워했다. 이들이 이곳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가 2005년. 막내인 철수(가명·10)는 고작 네 살이었을 때다. 그러니 가끔 들르는 ‘삼촌’들 눈에는 부쩍부쩍 자라는 아이들이 신기할 만도 하다.

누리의 집에는 이들 외에 중학생 17명, 고등학생 6명이 있다. 모두 29명. 부모가 없거나 부모들이 키우기 어려워 이곳에 보낸 아이들이다. 이 원장과 이영숙(52) 총무가 이들을 돌보고 있다.

정 과장은 “특별히 봉사를 한다든지 누리의 집을 돕는다든지 그런 마음은 없다”고 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선수(39) 과장은 “그저 남자어른이 안 계시는 고모 집에 가끔 들러 일을 봐주는 마음”이라고 했다.

김광훈 (38) 과장은 “그래도 이 두 분은 열심인데 저는 정말 바쁠 때만 얼굴 내미는 나쁜 조카”라고 했다. 이들이 이곳을 고모집처럼 여기는 것은 아이들이 이 원장을 ‘고모’로 부르기 때문. 밖에 나가서 ‘원장’이라고 하면 시설 아이들로 보는 따가운 시선이 싫어서 아이들과 투표로 호칭을 정했다고 이 원장이 들려준다. 대신 이 총무를 ‘엄마’라고 부른단다.

“특별히 하는 게 없다”는 이들의 말에 이 원장이 나섰다. “이분들 아니면 1000포기나 하는 김장을 어떻게 하겠어요. 1년에 한번씩 아이들과 함께 소풍도 다녀오고, 전기소켓이 고장 나면 달려와서 고쳐주고,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도 삼촌들이 나서지….” 옆에 있던 이 총무가 보탰다. “화장품도 갖다 줘서 아이들이 학교 가서 자랑하면서 쓰고 있고, 우리 애들 5명이 한꺼번에 진학할 때 교복도 해줬어요.” 이 원장은 “창고처럼 쓰던 방을 고쳐 아이들에게 컴퓨터 방을 마련해줬고, 2층 테라스를 보수해 아이들이 그림도 그리고 탁구도 칠 수 있게 해줬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의 칭찬에 얼굴이 벌개져 있던 삼촌들이 마침내 손을 내저었다. “에잇, 집 보수 때 비용은 본사에서 해준 거예요.” 지난해 로레알코리아에서 바자를 열어 임직원과 브랜드 모델들이 내놓은 애장품, 화장품들을 팔아 1100만원을 마련했고, 회사가 100% 매칭 그랜트를 적용하고, 개인 기부금을 더해 2700만원의 공사비를 보내줬던 것.

일일이 손꼽기 어려울 만큼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는 이 원장은 무엇보다 마음의 의지가 돼서 고맙다고 했다. 그는 “아이가 갑자기 아파 교통편이 필요할 때, 목돈이 아쉬울 때 이분들이 먼저 생각나고, 말하면 도와주겠지 싶어 안심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대부분 “일 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 말에 삼촌들이 살짝 삐쳤다. “그러지 마시라고 해도… 에구구.”

정 과장은 “지난해 원장님이 ‘내가 돌아가면 장례식도 치러주겠지 싶어 마음이 놓인다’는 말씀을 했을 때 우리는 이제 가족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는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춤거리게 마련인데 계기를 마련해준 회사가 무엇보다 고맙다”고 했다. 회사에선 이곳에서 일손이 필요하다면 근무시간 중에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나가서 돕도록 배려해주고 있다. 직원은 모두 69명. 일손을 배치하는 일을 맡고 있는 정 과장은 “김선수 과장과 몇 명이 월급의 10% 정도를 떼어 이곳을 돕는 데 쓰고 있다”면서 월급의 1∼2%씩 내놓는 직원들도 여럿 된다고 말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겠다는 이들에게 이 원장은 볼멘소리를 한다. “최 부장. 얼굴도 해쓱해지고 말랐던데, 술 먹지 말라고 해.” 최상선 부장은 물류센터 책임자로 누구보다 누리의 집 돕기에 열심인 사람이다.

정 과장 일행이 인사도 채 마치기 전에 이 원장은 페인트 붓을 들고 나섰다. 이들이 시금치 모종을 심는 동안 칠했던 각목을 마저 칠하기 위해서였다. 이 각목으로 레일을 만들고, 기차는 함석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줄 계획이란다.

정 과장은 페인트칠을 하는 이 원장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 퉁바리를 줬다. “아이고 그걸 뭐하려고 만들어요. 좀 틈이 나면 쉬지. 잠시도 쉬지를 못하신다니까. 좀 쉬세요.” 그런 정 과장에게 이 원장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원형이나 데리고 와! 기차놀이 하게, 그리고 선수 과장은 새댁 데리고 오고! 최 부장한테 당부 잊지 말고!”

원형이는 정 과장 큰 아들이다. 김 선수 과장은 얼마 전 장가를 들었다. 이들 가족 맞다. 오랫동안 쌓인 정으로 끈끈히 맺어진.

여주=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